파스칼과 니체: 신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파스칼과 니체는 정반대 길을 갔지만, 하나님이 계신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본 점은 같았습니다. 파스칼은 이성만으로 끝까지 갈 수 없는 사람에게 찾기 시작할 이유를 주었고, 니체는 신이 없다면 그 위에 세운 도덕과 의미도 무너진다는 것을 정직하게 보았습니다. 성경도 중립 지대 없이 생명을 택하라고, 찾으면 만나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답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을 준비하다가 서른아홉에 죽었고, 그 메모가 『팡세』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자라 그리스도교의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같았던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보았기에, 이 물음 앞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성경도 중립 지대를 두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했고 (수 24:15), 엘리야는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상 18:21).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 두 길을 놓습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신 30:19
하나님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시편은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시 14:1). 이 어리석은 자는 정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자기에게 셈을 묻지 않을 것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전도서는 하늘을 잠시 빼고 ‘해 아래’의 삶만 바라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자기의 모든 수고에서 무슨 유익을 얻으리요?
전 1:2-3
니체의 ‘미친 사람’이 바로 이 자리에 섭니다. 그는 환한 오전에 등불을 켜고 장터에서 신을 찾다가, 비웃는 불신자들에게 묻습니다. "지평선을 통째로 닦아 낼 해면을 누가 우리에게 주었는가?" 그리고 외칩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니체, 즐거운 학문 125 이것은 신이 없다는 논증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유럽이 위도 아래도 사라지는 대가를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진단입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 일찍 왔다고 합니다.
바울도 같은 선을 반대쪽에서 긋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고 (고전 15:19), 이런 말이 옳을 것이라고 합니다.
내일 우리가 죽을 터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자.
고전 15:32
그러나 바울은 이어 갑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하나님이 늘 분명히 보이시지는 않습니다. 이사야는 "진실로 주는 자신을 숨기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 45:15). 파스칼이 여러 번 인용한 구절입니다. 그래도 그분은 찾는 이를 만나 주십니다. "너희가 너희 마음을 다하여 나를 찾으면 나를 찾고 나를 만나리라" (렘 29:13). 많은 제자가 떠나갈 때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요 6:68).
교회의 증언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첫머리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을 위하여 지으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 파스칼은 이 안식 없는 사람을 다른 쪽에서 봅니다. "사람은 자연에서 가장 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 파스칼, 팡세 김 한 줄기에도 죽지만, 자기가 죽는 줄 알기에 자기를 짓누르는 우주보다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위대함과 비참함을 함께 설명하는 것이 창조와 타락을 말하는 그리스도교라고 보았습니다.
그 비참함을 보지 않으려고 사람은 사냥과 놀이와 출세에 빠집니다. "사람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에서 온다. 방 안에 가만히 머물 줄 모른다는 것이다." 파스칼, 팡세 가만히 있으면 죽음과 제 처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내기는 이런 사람에게 쓴 글입니다. 파스칼은 먼저 이성이 하나님이 계신지 결정해 주지 못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걸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배에 타 있다." 하나님이 계신 쪽에 걸어 이기면 모든 것을 얻고, 져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파스칼, 팡세.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이 아닙니다. 이성이 끝까지 데려다주지 못해 문턱에 멈춰 선 사람에게 찾기 시작할 이유를 주려는 말입니다. 그는 이 글을 쓴 사람이 앞뒤로 무릎 꿇고 기도했다고 덧붙입니다.
그 자신의 신앙은 계산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1654년 11월 23일 밤, 그는 두 시간쯤 하나님을 만난 일을 종이에 적어 죽을 때까지 옷 안에 꿰매고 다녔습니다. ‘불’이라는 말 아래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파스칼, 메모리알 파스칼은 가톨릭 신자였고,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운 포르루아얄의 얀센주의에 공감했습니다. 교황청은 1653년과 1713년에 얀센주의의 주장들을 정죄했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는 예수의 물음에서 (마 16:26) 오리게네스는 갈림길을 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앞에 놓여 있으니, 우리는 오히려 세상을 잃고 우리 영혼을 얻기를 택해야 합니다" 오리게네스.
원어로 보기
전도서의 "헛되다"는 헤벨(הֶבֶל)입니다. 본뜻은 입김, 곧 나타나자마자 흩어지는 숨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의 삶이 악하다고 하지 않고 손에 쥘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김 한 줄기면 된다는 파스칼의 말과 닮았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로 결론짓습니다 (전 12:13).
요한복음 10:10의 "생명"은 조에(ζωή)입니다. 한평생과 살림을 뜻하는 비오스와 달리, 조에는 살아 있음 그 자체이고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입니다. 예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또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10:10). "더욱 풍성히"의 페릿소스(περισσός)는 넘친다는 뜻입니다. 니체와 복음은 삶을 긍정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생명이 더 넘치느냐를 두고 다툽니다.
흔한 반론과 답
"내기는 도박이지 믿음이 아니다." 승산을 따지는 것은 장사이고, 성경의 믿음은 한 인격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고전적 반론도 셋 있습니다. 어느 신에게 걸라는 말인가? 믿음이 마음먹는다고 생기는가? 계산으로 믿은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내기만 떼어 놓으면 모두 일리 있는 반론입니다. 그러나 파스칼은 내기를 홀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팡세』의 나머지가 사람과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그리스도교뿐이라고 논증하려 하므로, 내기는 아무 신에게나 걸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을 마음대로 고를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고, 증거를 더 쌓기보다 정념을 줄이라고, 먼저 믿은 이들처럼 성수를 찍고 미사에 참여하며 시작하라고 권합니다. 계산이 구원한다고 보지도 않았습니다.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파스칼, 팡세 이 마음은 한갓 감정이 아니라 첫 원리를 곧바로 아는 자리입니다. 그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내기는 그 문 앞까지 데려갈 뿐입니다. 히브리서도 하나님은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히 11:6).
"니체는 신앙이 약함과 원한임을 보여 주었다." 니체에 따르면, 강자를 행동으로 이길 수 없던 이들이 강자를 악하다 부르고 제 무력함을 겸손과 온유라는 덕으로 바꾸어 상상 속에서 복수했습니다. "도덕에서 노예들의 반란은 원한(르상티망)이 스스로 창조하는 힘이 되어 가치들을 낳을 때 시작된다." 니체, 도덕의 계보 1.10 저세상에 소망을 두는 신앙은 이 세상과 몸과 기쁨에 아니라고 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니체는 고통까지 포함한 삶을 그대로 사랑하여, 이 삶을 영원히 되풀이해도 좋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방탕의 권유가 아니라 자기를 넘어서라는 혹독한 요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인정할 것도 있습니다. 남의 몰락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은근히 기뻐하는 마음, 몸과 세상을 업신여기는 경건은 실제로 있었습니다. 니체는 파스칼을 그리스도교의 가장 교훈적인 희생자로서 사랑한다고 썼는데, 파스칼의 엄한 금욕을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나 원한은 갚을 날을 기다리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눅 23:34). 니체도 『안티크리스트』에서 예수에게는 원한이 없었다며 바울과 교회를 탓했습니다. 하지만 바울도 욕을 당하면 축복했고 (고전 4:12), 약함을 힘 받는 자리로 알았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 (고후 12:10). 파스칼의 메모리알에도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이 적혀 있습니다 파스칼, 메모리알.
"하나님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다." 맞습니다. 신자보다 정직하고 너그러운 불신자도 많고, 바울도 이방인이 "본성을 통해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행할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롬 2:14). 물음은 선하게 살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선을 선하게 하느냐입니다. 이 점을 가장 세게 짚은 이가 니체입니다. 신은 버리고 그리스도교 도덕은 지키려던 조지 엘리엇 같은 영국인들을 두고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는 사람은 그로써 그리스도교 도덕을 붙들 권리를 제 발밑에서 빼내 버린다." 니체, 우상의 황혼 약한 이를 돌보고 원수를 사랑하는 도덕은 결코 자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도덕의 근거를 세우려는 진지한 철학자들도 있어 논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과 악은 누가 정하는가?에서 더 다룹니다.
더 생각해 보기
두 사람 모두 무관심을 거절합니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면 그 뜻을 끝까지 따라가라 했고, 파스칼은 아직 결정할 수 없다면 적어도 찾으라 했습니다. 그는 아직 찾지 못했어도 찾는 사람은, 행복하지는 않아도 이성에 맞게 산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논증보다 먼저 초대를 내미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마 11:28
이 쉼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찾던 그 안식입니다. 이 글에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니체처럼 정직하게, 파스칼처럼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이미 찾는 길에 서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기분 전환으로 이 물음을 미루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내가 지키는 가치 가운데 무엇이 남습니까? 내가 그리스도교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예수 때문입니까, 원한과 두려움으로 살던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까?
더 읽으려면 하나님은 존재하는가?와 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는가?를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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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질문
- 하나님은 존재하는가?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고, 창조 세계와 사람의 양심이 그분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세계의 존재와 질서, 우리 안의 도덕 감각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이지 수학 같은 증명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증거 없는 도약이 아니라, 찾는 사람에게 만나 주시겠다는 약속을 신뢰하며 계속 찾는 일입니다.
- 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는가?성경은 하나님이 영이시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창조와 성경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신 듯한 때가 있다는 것도 성경은 숨기지 않고, 탄식의 시편으로 그 아픔을 기도의 말로 삼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숨어 계심이 강요하지 않고 사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이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 선과 악은 누가 정하는가?성경은 선의 기준이 사람들의 합의나 하나님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성품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그 기준을 사람의 양심에 새기셨고, 율법으로 밝히셨으며,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도덕 감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도덕이 참인지 아닌지가 저절로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스도인들은 봅니다.
-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성경은 사람이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을 위해 지으신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그 안에서 나옵니다. 스스로 의미를 만든다는 반론은 진지하게 들어야 하지만, 성경은 의미가 만들어 내는 것이기 이전에 선물로 받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관련 주제
출처
-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125 (1882) — 미친 사람이 밝은 오전에 등불을 켜고 장터에서 신을 찾다가 '신은 죽었다! …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외친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읽기
- 블레즈 파스칼, 팡세 347 (Brunschvicg), 200 (Lafuma) —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약한 갈대일 뿐이지만, 생각하는 갈대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139 (Brunschvicg), 136 (Lafuma) — 기분 전환: 사람의 불행은 모두 방 안에 조용히 머물 줄 모르는 데서 온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233 (Brunschvicg), 418 (Lafuma) — 내기: 신이 있다는 쪽에 걸어 이기면 모든 것을 얻고, 져도 잃는 것이 없다.
- 블레즈 파스칼, 메모리알 1654 (Lafuma 913) — 1654년 11월 23일 밤의 체험을 적어 옷에 꿰매 지닌 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277 (Brunschvicg), 423 (Lafuma) —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1.10 (1887) — 도덕에서 노예들의 반란: 원한(르상티망)이 스스로 창조하는 힘이 되어 가치들을 낳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IX.5 (1889) —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5, 조지 엘리엇처럼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버리고 그 도덕은 지키려는 영국인들에게: 신앙을 버리면 그 도덕을 붙들 권리를 제 발밑에서 빼내는 것이다.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