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사전

경건주의

Pietism

경건주의는 17세기 말 독일 루터교회에서 일어난 갱신 운동으로, 바른 교리가 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거듭난 마음과 거룩한 삶에 뿌리내리기를 구했습니다. 슈페너와 프랑케와 친첸도르프를 거쳐 성경 읽기와 작은 모임, 이웃 사랑과 선교를 일으켰고, 웨슬리와 복음주의 운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머리의 신앙에서 마음의 신앙으로

30년 전쟁(1618–1648) 뒤 독일의 루터교회는 바른 신앙고백과 학식 있는 신학자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의 목사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1635–1705)가 보기에 많은 이의 신앙은 교리를 알고 예배에 참석하는 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바울이 경고한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모습을 (딤후 3:5) 그는 아파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신자들이 함께 성경을 읽고 나누는 경건 모임을 열었고, 1675년 『경건한 소원』에서 교회를 새롭게 할 길을 제안했습니다. 성경을 신자들 사이에 더 널리 읽을 것, 만인 제사장의 가르침을 실제로 살 것, 기독교는 아는 것을 넘어 사랑으로 행하는 것임을 가르칠 것, 논쟁에서도 이기려 하기보다 사랑으로 대할 것, 목회자를 학문과 함께 경건으로 기를 것입니다 슈페너, 경건한 소원.

오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너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경건주의자들에게 신앙의 중심은 거듭남이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슈페너는 이런 모임을 교회를 떠나는 길이 아니라 교회를 안에서 새롭게 하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로 여겼습니다.

사랑과 선교로

할레 대학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는 1690년대에 고아원을 열었고, 그 일은 학교와 성경 출판으로 커졌습니다. 할레에서 배운 이들 가운데서 인도 남부로 간 선교사들이 나왔습니다. 친첸도르프 백작(1700–1760)은 얀 후스의 신앙을 이어 온 모라비아 형제단을 자기 영지 헤른후트에 받아들였고, 이들은 1732년부터 먼 나라에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1738년 존 웨슬리가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모임에서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경험한 것도 모라비아 형제단과의 만남 속에서였습니다 웨슬리, 일지. 이렇게 경건주의는 감리교 운동과 복음주의, 그리고 개신교 선교의 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에도 비슷한 흐름이 있었고, 청교도의 경건 서적은 독일 경건주의자들에게도 읽혔습니다.

선물과 위험

경건주의는 성경을 신자들의 손에 돌려주고, 서로 돌보는 작은 모임을 되살리고, 믿음이 사랑으로 일하게 했습니다.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으되 오직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뿐이니라."을 말합니다 (갈 5:6). 그러나 정통 루터교 신학자들은 위험도 보았습니다. 마음과 체험을 앞세우다가 교리와 성례를 가볍게 여기고, 자기 체험으로 남의 신앙을 판단하며, 경건한 이들끼리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살아 있기를 바랐다고 답했습니다. 오늘 ‘경건주의적’이라는 말은 신앙을 개인의 마음 안에만 가두는 태도를 비판할 때 쓰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고아원과 선교를 일으킨 이 운동의 본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바른 교리와 뜨거운 마음은 서로 원수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경건주의와 대각성 과에서 더 자세히 다룹니다.

출처

  1.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 경건한 소원 1675
  2. 존 웨슬리, 일지 1738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