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심판이란 무엇인가?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사람의 삶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세상의 모든 일을 바로잡으시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날을 두려움만이 아니라 소망으로도 기다립니다. 심판자가 곧 자기를 위해 죽고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답
‘최후의 심판’이라는 말은 흔히 무서운 장면을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을 먼저 ‘바로잡는 일’로 그립니다. 이 세상에는 가해자가 벌을 받지 않고 피해자의 눈물이 닦이지 않은 채 끝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오셔서 세계를 판단하신다는 소식에 하늘과 땅과 바다가 기뻐하는 장면을 그립니다.
주 앞에서 기뻐하리니 이는 그분께서 오시되 친히 땅을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로다. 그분께서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자신의 진리로 백성들을 심판하시리로다.
시 96:13
아브라함은 소돔을 두고 "주께서 이런 식으로 행하여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과 함께 죽이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처럼 여기시는 것도 결코 있을 수 없나이다. 온 땅의 심판자께서 의롭게 행하여야 하지 아니하리이까? 하매"라고 물었습니다 (창 18:25). 성경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순교한 영혼들도 이 소망 안에서 "그들이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오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여, 주께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사 우리 피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는 일이 얼마나 더 지속되리이까? 하더라."라고 부르짖습니다 (계 6:9-10).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호소는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습니다.
신약은 이 심판을 맡으신 분이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합니다 (요 5:22). 바울은 아테네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통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이 그 증거라고 선포합니다 (행 17:31). 심판자는 낯선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분입니다.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고후 5:10
요한계시록은 크고 흰 보좌 앞에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계 20:12). 예수께서는 이 날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는 장면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은 굶주린 자를 먹이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갇힌 자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것이 곧 자기에게 한 일이었다고 선언합니다.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하였은즉 내게 하였느니라, 하고
마 25:40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심판은 일상의 행위를 진지하게 다룹니다. 로마서 2장은 하나님이 "그분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으시되"신다고 하며 (롬 2:6), 그분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롬 2:11).
그런데 같은 성경이 곧바로 이렇게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정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롬 8:1
예수께서도 그분의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사람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요 5:24). 바울은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묻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롬 8:34).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엡 2:9). 그러면 행위에 따른 심판과 은혜로 받는 구원은 어떻게 함께 있습니까?
교회의 증언
교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 모두 이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매튜 헨리는 로마서 2장을 풀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재판장이 되시리라는 것보다 죄인들에게 더 큰 공포를, 성도들에게 더 큰 위로를 말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매튜 헨리.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위해 죽으신 분이 심판대에 앉으신다는 위로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이 두 가지 뜻을 가진다는 점도 오래전부터 지적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5:24를 풀면서 이렇게 씁니다. "심판은 때로는 형벌을, 때로는 시험을 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말씀은 시험, 곧 드러남의 뜻으로 읽고, 믿는 사람이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씀은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믿는 사람도 그리스도 앞에 선다는 것은 같습니다. 다만 그 자리는 정죄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위를 따른 심판과 은혜로 받는 구원을 교회는 어떻게 함께 붙들어 왔을까요?
종교개혁의 전통, 곧 루터교와 개혁교회 전통은 사람이 오직 은혜로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으며, 선행은 그 믿음의 열매이자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칼뱅, 기독교 강요. 마지막 날의 심판에서 행위가 언급되는 것은 구원을 사는 값을 매기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참이었는지를 공개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합니다. 야고보서의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이 이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약 2:17).
가톨릭교회는 칭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다고 가르치면서도,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이 선행을 낳고 하나님은 그 선행을 영생으로 갚으시며, 그 공로도 결국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1999년 루터교 세계연맹과 가톨릭교회는 공동 선언에서, 구원이 오직 은혜로 주어지며 선행은 그 뒤따르는 열매라는 기본 진리에 함께 동의한다고 밝혔습니다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 두 전통은 선행의 위치와 ‘공로’라는 말의 쓰임을 두고 여전히 다르게 말하지만, 구원이 사람의 자랑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매튜 헨리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자선의 행위가 영원한 행복에 대한 자격을 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상속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상속자를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매튜 헨리.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가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인지, 아니면 ‘내 형제’라는 표현에 주목해 그리스도의 제자들, 특히 복음 때문에 고난받는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끝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교회 대부분이 지켜 온, 영원한 형벌을 의식 있는 고통으로 보는 견해, 마침내 존재가 소멸된다고 보는 견해, 모두가 결국 회복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주제는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에서 다룹니다.
원어로 보기
‘심판’으로 옮겨진 크리시스(κρίσις)는 ‘가르다, 판단하다’를 뜻하는 크리노(κρίνω)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중립적으로 ‘판단하여 가려냄’을 가리킬 수도 있고, 판단의 결과인 ‘정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5:24의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는 뒤쪽, 곧 정죄의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로마서 8:1에서 "정죄함"으로 옮겨진 말은 카타크리마(κατάκριμα)이며, 판결이 내려진 뒤의 유죄 선고를 뜻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 유죄 선고가 없다고 합니다. 심판의 날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날 유죄 선고가 내려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심판대’로 옮겨진 베마(βῆμα)는 본래 계단을 올라서는 높은 단, 곧 재판관이 앉는 자리를 가리켰습니다. 고린도에서는 갈리오 총독이 베마에 앉아 바울의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행 18:12).
흔한 반론과 답
"사랑의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이것은 가장 흔하고 진지한 반론입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지 벌하는 것이 아니라는 직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불의를 당한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대를 당하고도 끝내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한 사람 앞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바로잡지 않으신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악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 사랑은 피해자에 대한 무관심과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분의 사랑과 대립시키지 않고, 사랑이 악을 그대로 두지 않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요 3:17).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심판하기를 즐기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십자가에서 그 값을 치르신 분입니다.
"누가 감히 사람을 심판하는가? 사람은 모두 다르고, 하나님이 사람의 사정을 다 아시겠는가?" 이 반론에는 정당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최종적으로 정죄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금하셨습니다 (마 7:1). 사람 재판관은 동기를 볼 수 없고 모든 사정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심판자는 "말하기를, 보라,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시겠느냐? 또 네 혼을 지키시는 이가 그것을 알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분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각 사람에게 보응하지 아니하시겠느냐?"입니다 (잠 24:12). 그분은 우리가 겪은 환경과 받은 빛, 하지 못한 일과 알지 못한 일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를 보십시오.
"행위대로 심판받는다면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겉으로는 모순처럼 보이고, 신학자들도 오래 논쟁해 왔습니다. 그러나 두 문장은 서로 다른 것을 묻습니다. 은혜는 ‘무엇이 나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고, 행위는 그 은혜가 삶에서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개신교는 이를 믿음의 증거로, 가톨릭은 하나님의 선물인 공로로 설명하는 등 전통마다 선행의 위치를 달리 말하지만, 구원을 자랑거리로 만드는 전통도, 행함 없는 믿음을 참된 것으로 여기는 전통도 없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인의 공력이 불로 시험받아, 공력이 불타 해를 받더라도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고전 3:15). 구원은 우리 공력 위에 세워지지 않았고,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최후의 심판은 두려움을 부추기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 날을 말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악이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있음을 알려 주려는 것, 그리고 그날 우리 편에 서 계실 분을 미리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허물이 드러날 일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둘 다일 수도 있다면, 십자가는 그 둘에 어떻게 답합니까?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는 내 삶에서 누구입니까?
더 읽으려면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 예수는 다시 오시는가?, 칭의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마태복음 25장과 로마서 8장을 이어서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관련 질문
-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성경은 하나님과 함께 누릴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자리의 무서운 실재를 모두 말합니다. 천국은 구름 위의 휴양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며, 지옥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자 생명이신 하나님을 잃는 것입니다. 지옥의 본성에 대해서는 영원한 형벌, 소멸설 등 서로 다른 견해가 있어, 이 글은 그것을 공정하게 소개합니다.
- 예수는 다시 오시는가?교회는 처음부터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성경은 그분이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몸으로, 눈에 보이게, 영광 가운데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며, 이 약속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과 깨어 있음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 칭의란 무엇인가?칭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받아 주시는 일입니다. 모든 교회는 이것이 우리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믿음을 통해 온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칭의가 법정의 선언인지, 사람을 실제로 새롭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지, 믿음과 행함은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종교개혁 이후 교회들이 다르게 설명해 왔고, 오늘은 상당 부분 서로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망가졌고, 하나님은 악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욥에게는 설명 대신 당신 자신을 보이셨고, 십자가에서는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악이 끝나는 날을 약속하십니다.
관련 주제
출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