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20세기
1907년 평양의 회개로 시작된 한국 교회의 20세기에는 삼일 운동과 신사참배의 시련, 전쟁과 분열, 놀라운 성장과 세계 선교, 그리고 민중신학의 물음이 함께 있습니다. 이 과는 그 이야기를 여러 쪽의 목소리로 듣고, 첫째 계명 앞에 선 교회가 무엇을 배웠는지 묻습니다.
회개로 시작된 세기
이 과정의 19세기 복음주의와 선교, 그리고 한국 과에서 본 대로, 한국에는 선교사보다 말씀이 먼저 왔습니다. 20세기의 한국 교회는 나라를 잃은 백성 가운데서, 그 뒤에는 전쟁과 가난과 빠른 성장 속에서 한 물음을 안고 살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교회가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신실할 수 있는가?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의 겨울 사경회에서 큰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저녁 집회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소리 내어 기도했고, 이어 사람들이 일어나 미움과 도둑질과 거짓 같은 죄를 울며 고백했습니다. 장로 길선주(1869–1935)도 죽어 가던 친구가 맡긴 재산에서 돈을 떼어 가진 죄를 고백했다고 전해집니다. 고백한 이들은 서로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갚았으며, 이 부흥은 여러 지방과 학교로 번졌습니다.
중국에서 일하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조너선 고퍼스는 그해 한국을 찾았고, 이 부흥이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 공부, 그리고 죄를 깊이 깨달은 이들의 고백에서 왔다고 전합니다 고퍼스, 성령의 불이 한국을 휩쓸 때. 그들이 따른 것은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약 5:16). 존 웨슬리는 이 구절을 풀며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누구에게든 고할 수 있습니다"라고 씁니다 웨슬리.
이 무렵 뿌리내린 습관은 지금도 한국 교회의 얼굴입니다. 길선주가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했다고 흔히 전해지는 새벽 기도회, 함께 부르짖는 통성 기도, 며칠씩 모여 성경을 배우는 사경회,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서 드린 헌금과 전도할 날을 바치는 ‘날 연보’가 그것입니다. 역사가들의 평가는 갈립니다. 어떤 이들은 이 부흥이 나라를 잃어 가던 때에 교회의 눈을 마음속으로만 돌렸다고 보고, 다른 이들은 여기서 자란 도덕의 힘과 공동체가 12년 뒤 삼일 운동에서 드러났다고 봅니다.
나라 잃은 교회와 첫째 계명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었고, 만세 운동이 온 나라로 번졌습니다. 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 사람이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일본을 탓하기보다 바른 길을 열자고 하며 끝까지 질서를 지키라고 당부했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 서명자 가운데 개신교인은 흔히 열여섯 명으로 꼽히는데, 길선주와 장로 이승훈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개신교인은 인구의 작은 일부였지만 교회와 학교가 운동의 연락망이 되었고, 많은 신자가 갇혔습니다. 4월에는 경기도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주민들을 교회당에 모아 놓고 총을 쏘고 불을 질러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는 학교와 교회에 신사참배를 요구하며,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고 했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감리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보다 앞서 이 설명을 받아들였고, 일부 장로교 선교부는 학교 문을 닫는 길을 택했습니다. 193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제27회 총회는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국가 의식이라며 이를 받아들이는 결의를 했습니다. 반대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회의 전부터 대표들은 경찰의 압박을 받았고, 거부하면 교회가 닫히고 신자들이 흩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당국의 설명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들은 양 떼를 지키려고 굴복했습니다.
끝까지 거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1897–1944)는 1938년부터 여러 차례 갇혔고, 그가 옥에 있는 동안 노회는 그를 목사직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그는 1944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일사각오’, 곧 한 번 죽기를 각오한다는 말로 그의 길을 요약합니다. 한상동, 손양원 같은 이들은 해방 때까지 옥에 있었고, 옥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붙든 것은 십계명의 처음 두 계명이었습니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3-5
당국은 신사 앞의 절이 국민의 예의일 뿐이라고 했지만, 거부한 이들은 신사에 모신 것이 신들이고 그 앞에 절하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이 금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첫째 계명이 형상 앞의 절보다 더 깊은 데까지 닿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즐거워하고, 의지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우리가 신으로 삼는 것입니다" 웨슬리. 그들을 붙든 약속은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1938년을 돌아보는 것은 누구에게 손가락질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경찰의 눈 아래 앉았던 총회 대표들도, 양 떼를 염려하던 목사들도 우리처럼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라면 더 굳게 섰으리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는 그 결의가 잘못이었음을 덮지 않습니다. 해방 뒤 총회는 결의를 취소했고, 여러 교단이 이를 공적으로 죄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1907년 독노회의 조직과 그때 받아들인 12신조, 그리고 결의를 취소한 해(1954년으로 전해집니다)는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한국의 장로교회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쟁과 분열, 그리고 성장
1945년 8월의 해방은 곧 남북의 분단으로 이어졌습니다. 공산 정권 아래 북쪽의 교회는 큰 압박을 받았고, 많은 신자가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한국 전쟁 동안 많은 예배당이 무너지고 많은 목사와 신자가 죽거나 북으로 끌려갔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살이를 한 손양원 목사는 1948년 여순 사건 때 두 아들을 죽인 일에 가담한 청년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고, 1950년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해방 뒤 장로교회는 거듭 나뉘었습니다. 1951년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던 경남 노회의 대표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듬해 옥에서 나온 이들과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고신이 신사참배에 대한 분명한 회개와 교회의 정결을 내세우며 따로 섰고, 총회 쪽은 교회의 질서와 하나 됨을 지키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1953년에는 김재준과 조선신학교 쪽이 성경을 비평적으로 연구할 자유를 내세우며 기장을 이루었고, 반대편은 성경의 무오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지키려 한다고 했습니다. 1959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 등을 두고 합동과 통합이 갈라졌습니다. 합동은 WCC가 자유주의로 기울었다고 보았고, 통합은 세계 교회와의 사귐이 복음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토록 여러 교단으로 갈라져 왔는지는 질문 글 교회는 왜 이렇게 많이 나뉘었는가?에서 함께 생각해 봅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나라가 빠르게 산업화되고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는 동안 교회는 놀랍게 자랐습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의 서울 집회 같은 큰 전도 집회가 이어졌고, 1990년대 중반의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의 약 5분의 1이 개신교인이라고 답했습니다. 1958년 천막에서 시작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교회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조용기 목사가 이끈 이 교회는 성령 충만과 신유, 구역 모임과 기도를 강조했고, 혼이 형통하는 것같이 형통하고 건강하기를 비는 요한삼서의 인사를 (요삼 1:2) 바탕으로 ‘삼중 축복’을 전했습니다. 이 메시지가 전쟁 뒤의 가난 속에서 희망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고, 복을 앞세우다 십자가의 길이 흐려질까 염려한 이들도 있습니다. 오순절 운동의 이야기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과에서 다룹니다.
한국 교회는 일찍부터 보내는 교회였습니다. 1907년 독노회는 첫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을 제주에 보냈고, 몇 해 뒤에는 중국 산둥에도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1980년대부터 해외 선교사가 크게 늘어, 2010년대에는 2만 명이 넘는다는 선교 단체들의 집계가 나왔습니다. 선교를 받던 아시아의 교회가 세계 곳곳으로 복음을 들고 나간 것입니다. 이 물음은 기독교는 서양 종교인가?에서 더 다룹니다.
민중신학과 복음주의의 물음
성장의 시대는 독재와 고된 노동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 11월 서울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제 몸에 불을 붙였을 때, 몇몇 신학자는 교회가 고난받는 이들 곁에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1970년대에 생겨난 민중신학을 대표하는 이가 서남동(1918–1984)과 안병무(1922–1996)입니다. 두 사람은 유신 체제에 맞서다 1970년대 중반 대학에서 쫓겨나고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민중신학은 정치적으로 억눌리고 경제적으로 빼앗기고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 곧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봅니다 민중신학. 안병무는 마가복음이 예수를 둘러싼 무리를 라고 부르는 데 주목했습니다. 이 무리는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과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이었고, 예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그들 편에 서셨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삶과 죽음을 ‘예수 사건’이라 부르고, 이 사건이 오늘 고난받는 민중의 사건 속에서 다시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서남동은 출애굽과 예언자와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의 민중 이야기와, 억눌린 이들의 한(恨)이 쌓인 한국 민중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류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출애굽은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그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을 들었나니" 하신 하나님을 (출 3:7) 보여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 신학이 교회가 잊기 쉬운 가난한 이웃을 다시 보게 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역사와 구원의 주체는 민중인가, 은혜로 일하시는 하나님인가? 성경은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라고 말하는데 (벧전 3:18), 민중의 고난을 그 십자가와 같이 볼 수 있는가? 마가복음의 예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부르셨고 (막 1:15), 가난한 이도 부자도 모두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민중의 경험이 성경과 나란히 계시의 자리가 될 수 있는가? 한편 복음주의자들도 1974년 로잔 언약에서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을 뉘우쳤습니다 로잔 언약.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와 세계 선교 과에서 다룹니다.
오늘의 지도와 남은 것
200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새 물음 앞에 서 있습니다. 여러 조사는 젊은 세대에서 교회를 떠나거나 종교가 없다고 답하는 이들이 늘었음을 보여 주고, 지도자들의 잘못과 교회 안의 다툼이 알려지면서 사회의 신뢰도 크게 줄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교회와 신자가 말씀 읽기와 기도, 작은 공동체, 투명한 살림, 이주민과 북한 이탈 주민을 섬기는 일에서 새로워짐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직 쓰이는 중입니다.
한국 교회의 20세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 자리와 교회가 고개를 들 수 없는 자리가 나란히 있습니다. 그 시작에는 숫자가 아니라 죄를 고백하는 눈물과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고, 가장 어두운 때에는 죽기까지 첫째 계명을 지킨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신이 된다면, 오늘 우리를 시험하는 것은 신사가 아니라 돈과 성공과 교회의 크기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에 "네가 어디로부터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며 처음 행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계 2:5). 이 과로 신학 과정의 이야기는 오늘에 이릅니다. 교부들과 개혁자들과 선교사들이 물려준 믿음은 이제 우리 교회의 손에 있습니다.
연습
- 연습 1 / 8
1907년 평양 대부흥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8
1919년 삼일 운동과 개신교인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3 / 8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가 한 결의는 무엇입니까?
- 연습 4 / 8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1944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난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는 누구입니까?
- 연습 5 / 8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들이 붙든 말씀은 무엇입니까?
- 연습 6 / 8
1952년 고신이 따로 서면서 내세운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7 / 8
민중신학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8 / 8
복음주의자들이 민중신학에 던진 물음으로 이 과가 소개한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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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주제
출처
- 조너선 고퍼스, 성령의 불이 한국을 휩쓸 때 1943 — 1907년 평양 대부흥을 목격한 선교사의 증언.
- 민족 대표 33인, 기미독립선언서 1919 —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개신교인이었다(천도교 15인, 불교 2인).
-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신학위원회 엮음, 민중신학 1981 — 고난받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한국 민중신학을 소개한 책.
- 로잔 세계복음화국제대회, 로잔 언약 1974 — 1974년. 전도의 우선성과 사회적 책임을 함께 고백한 복음주의 선언. 3항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자연에서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