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하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 1128년경
영어 본문: W. H. 밴 앨런 영역(1909) · CCEL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하여』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하나님을 왜, 얼마나 사랑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답한 짧은 논고로,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데서 시작해 하나님 때문에만 자기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사랑의 네 단계를 그립니다.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1090년 부르고뉴의 디종 가까이에 있는 퐁텐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을 조금 넘긴 1112년 또는 1113년(자료마다 다릅니다), 그는 형제들과 친척과 벗들을 이끌고 시토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첫 전기에 따르면 그때 함께 들어간 이가 서른 명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시토는 1098년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을 더 엄격하고 단순하게 지키려는 수도사들이 세운 수도원으로, 이 공동체에서 시토회가 자라났습니다. 1115년 베르나르는 수도사 몇 사람을 데리고 샹파뉴의 한 골짜기에 클레르보 수도원을 세웠고, 115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의 수도원장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수도원 담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설교와 편지는 교황과 왕들에게까지 닿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시토회는 유럽 곳곳으로 퍼졌습니다. 1130년 교황 선출이 둘로 갈렸을 때 그는 여러 해 동안 인노켄티우스 2세를 위해 애썼고, 1140년 또는 1141년 상스 공의회에서는 아벨라르의 가르침에 맞섰습니다. 그 이야기는 신학 과정의 안셀무스와 스콜라 신학의 시작 과에 나옵니다. 1145년 클레르보의 수도사였던 이가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가 되자, 그의 부탁으로 베르나르는 1146년 제2차 십자군을 설교했습니다. 원정은 실패로 끝나 그의 말년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같은 무렵 라인 지방에서 한 수도사가 유대인을 공격하라고 부추기자, 베르나르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그 선동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를 가장 오래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말한 설교자로서입니다. 1135년 무렵 시작해 죽을 때까지 다 마치지 못한 『아가 설교』 여든여섯 편에서 그는 아가를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한 영혼 사이의 사랑 노래로 읽었습니다. 그의 말이 꿀처럼 달다 하여 후대는 그를 ‘꿀처럼 흐르는 박사’(Doctor Mellifluus)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1174년 시성되었고, 가톨릭 교회는 1830년 그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하여』는 로마 교회의 부제급 추기경이자 상서원장인 하이메릭에게 보낸 글입니다 헌정사. 하이메릭은 교황청의 문서를 맡은 사람으로, 1130년 교황 선출이 갈렸을 때 베르나르와 같이 인노켄티우스 2세 편에 섰습니다. 그는 베르나르에게 여러 물음을 보냈지만, 베르나르는 그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관한 물음 하나만 받습니다. 그 물음이 ‘가장 달콤하고, 가장 안전하게 다룰 수 있으며, 가장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헌정사. 언제 쓴 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흔히 1128년 무렵으로 보지만, 1120년대 후반에서 1130년대에 걸쳐 넓게 잡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두 물음과 네 단계
베르나르는 하이메릭이 물은 것, 곧 하나님을 왜, 그리고 얼마나 사랑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첫 문단에서 답을 다 내놓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 그분이시며,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의 척도는 척도 없는 사랑입니다’ 1.1. 라틴어에서 척도로 옮긴 말은 ‘모두스’(modus)인데, 그 척도가 바로 ‘시네 모도’(sine modo), 곧 척도 없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놀이입니다. 생각 깊은 사람에게는 이 한마디로 넉넉하지만, 그는 어리석은 자에게도 빚진 자이고 단순한 사람들도 생각해야 한다며 그 뜻을 차근차근 풀어 갑니다.
1장부터 7장까지는 이 대답을 푸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1장), 믿지 않는 사람도 받은 선물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을 빚지고 있다는 것(2장),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와 부활을 알기에 더 큰 빚을 졌다는 것(3–5장)을 말하고, 짧게 요약한 뒤(6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얻는 상이 무엇인지 묻습니다(7장). 그리고 7장 끝에서 방향을 돌려, 그런 사랑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살피겠다고 말합니다 7.8.
8장부터 11장까지가 이름난 사랑의 네 단계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하고, 다음에는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다음에는 하나님을 하나님 그 자체 때문에 사랑하고, 끝으로 하나님 때문이 아니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12장부터 마지막 15장까지는 베르나르가 전에 카르투시오회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옮겨 적은 것입니다. 새로 받아쓰게 하는 것보다 옮겨 적는 것이 더 쉽다는 그의 솔직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12.1. 이 서재는 논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싣고 있어서 빠진 부분이 없습니다. 헌정사와 1–7장이 첫째 부분, 8–15장이 둘째 부분입니다.
이유는 하나님, 척도는 척도 없이
베르나르는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두 뜻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무엇이 사랑스러운가,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내가 무엇을 얻는가입니다. 어느 쪽이든 답은 하나님 그분입니다 1.2. 하나님이 사랑받으셔야 할 첫째 까닭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누가 사랑하셨는지, 누구를 사랑하셨는지,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보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되었던 우리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1.4.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요일 4:19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도 먹을 것과 햇빛과 공기를 받고, 그보다 높은 선물로 존엄과 지혜와 덕을 받았습니다. 베르나르가 말하는 존엄은 자유의지입니다 2.1.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면서도 자기 것인 양 자랑하는 것은 더 나쁩니다. 그래서 그는 ‘무지는 짐승 같은 것이요, 오만은 마귀 같은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2.4. 그러나 그는 곧 덧붙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또는 자유의지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그것이 나온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아니 오히려 불가능한 일입니다’ 2.6. 사랑해야 할 의무는 모두에게 있지만, 그 사랑을 드릴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큰 빚을 졌습니다. 3장과 4장에서 베르나르는 아가의 신부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신랑을 바라보는 교회를 그립니다. 그는 아가의 왼손과 오른손을 땅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하늘에서 누릴 그분의 임재로 읽습니다 4.4. ‘땅 위에 있는 우리 가운데에는 그분에 대한 기억이 있으나, 하늘나라에는 그분의 임재 자체가 있습니다’ 3.6. 5장은 창조와 구속을 견줍니다. ‘첫 창조에서 그분은 제게 저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새 창조에서는 제게 그분 자신을 주셨고, 그 선물로 제가 잃어버렸던 저 자신을 되돌려 주셨습니다’ 5.2. 그러니 그는 하나님을 마땅한 만큼 사랑할 수는 없어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사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6.1.
7장은 사랑의 상을 묻습니다. ‘사랑은 영혼의 감정이지 계약이 아닙니다’ 7.1. 굶주린 사람에게 먹으라고, 어머니에게 아이에게 젖을 먹이라고 삯을 주는 사람은 없듯이,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그분 말고는 다른 상을 구하지 않습니다 7.2. 땅에 땅을 더하고 집에 집을 더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사람은 피조물을 하나씩 다 맛보아도 쉼을 얻지 못합니다. ‘안식은 오직 그분 안에만 있습니다’ 7.4.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 첫 장에서 고백한 쉼 없는 마음이 여기서 다시 들립니다 1.1.1. 베르나르는 이 대목에서 시편을 인용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나이까? 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내 육체와 내 마음이 쇠약하오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힘이시요, 영원토록 내 몫이니이다.
시 73:25-26
그런데 이 갈망마저 하나님이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랑의 작용인이시자 궁극적 대상이시며, 여기에 역설이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곧 ‘이미 주님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주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7.7. 우리가 아무리 일찍 기도하러 나아가도 ‘아무도 주님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7.7.
사랑의 네 단계
첫째 단계는 본성에서 시작합니다. 본성은 연약해서 먼저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베르나르는 이것을 육적인 사랑이라 부릅니다. ‘사람은 이 사랑으로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 때문에 자기를 사랑합니다’ 8.1. 이 사랑이 넘쳐 쾌락으로 흐르려 할 때,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제방처럼 그 물을 막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만 알던 사랑이 이웃을 품는 사랑이 됩니다. 그런데 이웃을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을 겪게 하시고, 힘이 다한 사람이 그분의 손에 건짐을 받게 하십니다. 그렇게 사람은 ‘바로 그 자기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8.3. 이것이 둘째 단계,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베르나르는 이 단계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얼마나 적은 일밖에 못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아는 것만 해도 적지 않은 일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환난이 거듭될수록 사람은 거듭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러다 보면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맛보게 됩니다 9.1.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시 34:8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제는 여자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분의 말을 들었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듯이 (요 4:42), 이제 그는 필요 때문이 아니라 직접 맛보고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셋째 단계입니다. ‘사랑의 셋째 단계는 하나님을 하나님 그 자체 때문에, 오직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9.1.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 단계에 이르는 길을 평범하게 적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계명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그는 이 상태에 오래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15.1.
넷째 단계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는 이 땅에서도 누군가가 한순간 그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보지만, 곧 몸의 필요와 날마다의 일이 그를 끌어내리고 ‘무엇보다 형제 사랑이 그를 의무로 다시 불러들입니다’ 10.1. 그는 이 사랑을 포도주에 떨어진 물 한 방울, 불에 달군 쇠, 햇빛이 가득한 공기에 견주고, 바울의 말(고전 15:28)을 빌려 묻습니다. ‘사람 안에 단지 인간적인 무엇이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10.2 그러나 곧바로 선을 긋습니다. ‘실체는 남겠지만, 다른 아름다움과 더 높은 능력과 더 큰 영광 가운데 남을 것입니다’ 10.2. 이 단계에는 ‘사람의 어떤 노력으로도 이를 수 없습니다’ 10.3.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온전함은 부활의 몸을 입을 때에야 옵니다. 15장에서 그는 이 세상에서 넷째 단계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저로서는 그것이 제 힘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라고 씁니다 15.1.
그래서 11장은 몸을 귀하게 여깁니다. 세상을 떠난 성도의 영혼도 아직 몸을 다시 받기를 바라므로, 자기를 온전히 내어 드리지는 못한 상태라고 그는 봅니다 11.1. 몸은 짐이 될 때에도 영혼을 돕고 부활 때에는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으니, ‘육신은 선한 영혼에게 선하고 신실한 동반자입니다’ 11.3. 그는 아가 5장 1절의 초대를 세 단계의 잔치로 읽습니다. ‘죽기 전에는 먹으라. 죽은 뒤에는 마시기 시작하라. 부활한 뒤에는 풍성히 마시라’ 11.5. 그 끝에서 하나님 그분이 ‘영원한 사랑의 영원한 상급’이 되십니다 11.5. 이 소망에 관해서는 교리 과정의 부활 과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카르투시오회에 보낸 편지는 같은 길을 다른 말로 걷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도 세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 사람은 종이어서 자기를 위하여 두려워하고, 둘째 사람은 탐욕스러워 더 많은 은덕을 바라지만, 셋째 사람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아들입니다’ 12.2. 두려움도 자기 이익도 영혼을 돌이키지 못하고 오직 사랑만이 돌이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12.3. 그렇다고 아들의 사랑이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결코 두려움 없이 있지 않으나, 그 두려움은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14.2. 바울이 말한 양자의 영, 곧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는 영 안에서 (롬 8:15), 사랑은 종과 삯꾼의 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합니다 14.2.
이 책을 잘 읽으려면
베르나르는 여러 전통에서 사랑받아 왔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를 성인이자 교회 박사로 기리며, 이 논고를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읽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사람을 신화(神化)하는 기쁨’이라 부를 때 4.4, 그 말은 동방 교회가 말하는 신화의 가르침과도 닮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그를 존중했습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를 자주 인용합니다. 믿음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스콜라 학자들과 견주어 ‘베르나르의 말이 얼마나 더 나은가’라고 하고 3.2.41, 칭의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그의 잘 알려진 말을 아우구스티누스의 말과 나란히 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지만,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다’ 3.11.22.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나르가 에우게니우스에게 써 보낸 『숙고에 관하여』를 본받는다며, 그 책을 ‘모든 교황이 외우고 있어야 할 그 책’이라 부릅니다 편지 20. 필리프 멜란히톤이 훗날 전한 바로는,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서 한 늙은 수도사가 괴로워하던 젊은 루터에게,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죄 사함은 자기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는 것이라고 일러 주며 칼뱅이 3.2.41에서 인용하는 바로 그 베르나르의 수태고지 설교를 가리켜 보였다고 합니다.
복음주의 독자가 조심스럽게 읽을 대목도 있습니다. 넷째 단계의 말, 곧 자기를 잃고 하나님 안에 삼켜진다는 말은 피조물이 창조주 안으로 녹아든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르 스스로 실체는 남는다고 말하며, 그가 말하는 연합은 "주와 결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는 말씀대로 (고전 6:17) 뜻과 사랑의 하나 됨입니다. 그러니 이 대목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부활 때의 영화에 비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 어디까지 온전해질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웨슬리 전통이 온전한 사랑이 이 세상에서도 주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웨슬리, 성경적 구원의 길 I.9, 개혁 전통은 성화가 이 세상에서는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장 2항. 베르나르의 조심스러움은 두 전통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또 이 책은 수도원에서, 수도사의 삶을 전제로 쓰였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하나님께 이르는 지름길로 읽는 대목 7.6이나, 사랑이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받을 만하다는 말 7.1에서, 개신교 독자는 수도 생활과 공로를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베르나르 자신이 사랑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의 은혜에 두고 있다는 것을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그는 집회서와 지혜서도 성경으로 인용하는데, 가톨릭 교회는 이 책들을 제2경전으로 받고 개신교는 외경으로 구별합니다. 3–4장처럼 아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읽는 알레고리적 해석은 중세만이 아니라 종교개혁 뒤의 많은 설교자도 이어 갔고, 오늘날 많은 해석자는 아가를 먼저 남녀의 사랑 노래로 읽습니다.
천천히, 기도하며 읽으십시오. 베르나르의 문장에는 성경이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 이 서재의 한국어는 그가 인용하는 구절을 대개 흠정역의 말씀 그대로 옮겼으니, 낯익은 말씀이 들리면 잠시 멈추어 그 구절을 펴 보아도 좋습니다. 3–4장의 아가 묵상은 처음에는 낯설 수 있으니, 처음 읽을 때는 1장과 7장, 그리고 네 단계를 간추린 15장을 먼저 읽고 돌아와도 괜찮습니다. 개신교 찬송가에도 그의 이름으로 불려 온 노래들이 있습니다(‘구주를 생각만 해도’, ‘오 거룩하신 주님’). 둘 다 중세 라틴어 시에서 나온 노래인데, 오늘날 학자들은 대부분 그 시들을 베르나르가 짓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래도 그 노래들이 그의 이름으로 불린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가 평생 말한 것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그분 자신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