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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주 공의회 결정

529 · 제2차 오랑주 공의회

해설

오랑주 공의회 결정은 529년 남부 갈리아의 오랑주에 모인 감독들이 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하여 채택한 25개 조항과 맺음말입니다. 펠라기우스 논쟁 뒤에 남은 물음, 곧 믿음의 시작이 누구에게서 오는가에 답하여 믿고자 하는 첫 마음까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누구든 악으로 예정되었다는 가르침은 물리쳤습니다.

포플러가 선 빈터에 윗부분이 부조로 뒤덮인 세 아치의 로마 개선문이 서 있는 옛 세피아 사진.
에두아르 발뒤스, 〈오랑주의 고대 개선문〉, 1864년 무렵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출처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400년 무렵 로마에서는 브리타니아 출신으로 알려진 수도사 펠라기우스가 존경받는 교사였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도 느슨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이 선한 본성을 주셨으니 사람은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할 수 없다는 핑계는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을 명하셨다고 탓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펠라기우스, 데메트리아스에게 보낸 편지. 그에게 은혜란 하나님이 주신 본성과 자유의지, 율법,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보기, 그리고 지난 죄의 용서였습니다. 아담의 죄는 나쁜 본보기로 후손을 해쳤을 뿐 망가진 본성을 물려주지는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펠라기우스주의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하나님께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원하시는 것을 명하시라고 기도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이 기도를 듣고 견디지 못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여기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이 죄로 병든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며, 의지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묶여 있어서 은혜가 고치고 풀어 주어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논증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본성과 은총. 은혜는 밖에서 보여 주는 본보기가 아니라 안에서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는 415년 팔레스타인의 디오스폴리스 회의에서 혐의를 벗기도 했지만 아프리카의 교회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미치며, 은혜는 지난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죄짓지 않도록 실제로 돕고, 해야 할 일을 알게 할 뿐 아니라 그 일을 사랑하고 행하게 한다고 고백하며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정죄했습니다 카르타고 공의회(418). 같은 해 로마의 감독 조시무스도 처음의 망설임을 접고 정죄에 동의했고, 431년 에베소 공의회도 펠라기우스를 따르던 이들을 정죄했습니다. 오랑주의 제1조와 제2조는 이 정죄를 이어받아, 아담의 죄로 몸만이 아니라 영혼도 해를 입었고 죽음만이 아니라 죄도 온 인류에게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제2조가 드는 바울의 말씀이 그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롬 5:12

이 가르침은 교리 과정의 원죄와 그 결과 과와 신학 과정의 아우구스티누스: 은혜의 박사 과에서 더 다룹니다.

갈리아의 수도사들과 믿음의 시작

레랭 제도 생토노라섬의 소나무 사이로 잔잔한 만 건너편에 옛 요새 수도원의 네모난 탑이 서 있고, 뒤로 산줄기가 이어지며, 물가 바위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채색 사진입니다.
포토글로브사, 〈칸, 생토노라 수도원〉, 1890–1900년 무렵 · 출처

펠라기우스가 정죄된 뒤에도 물음 하나가 남았습니다. 은혜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데는 모두 동의했지만, 은혜를 구하는 첫 마음, 곧 믿음의 시작은 누구에게서 오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420년대 후반, 남부 갈리아(오늘의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유와 레랭 섬의 수도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년 가르침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일었습니다. 가장 이름난 이는 마르세유에 수도원을 세우고 이집트 사막 수도사들의 지혜를 서방에 전한 요한 카시아누스입니다. 그는 펠라기우스를 따르지 않았고 은혜가 꼭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담화집』에서는 하나님이 때로는 바울과 마태처럼 원하지 않는 사람을 먼저 이끄시고, 때로는 사람 안에 선한 뜻이 싹트기를 기다렸다가 도우신다고 보았으며, 삭개오와 십자가의 강도를 사람의 뜻이 먼저 움직인 예로 들었습니다. 이들의 염려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에 달려 있다면 권면과 수고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마르세유에 살던 아키텐의 프로스페르는 평신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소식을 편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알렸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도의 예정』과 『견인의 선물』로 답하며, 믿음의 시작까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도의 예정. 그는 자기도 한때 믿음만은 우리에게서 난다고 생각했으나 "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씀 (고전 4:7) 앞에서 생각을 고쳤다고 회고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30년에 세상을 떠났고, 프로스페르는 그 뒤로 오래 그의 가르침을 변호하며 그의 글에서 뽑은 문장들을 엮었습니다.

반대쪽에서는 레랭 수도원장을 지내고 리에의 감독이 된 파우스투스가 5세기 후반 『은혜론』을 썼습니다. 그는 은혜가 꼭 필요하지만 은혜를 구하는 첫 움직임은 사람의 의지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멸망으로 정하셨다고 가르친 사제 루키두스를 바로잡는 데 앞장선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카시아누스와 파우스투스의 가르침은 천 년도 더 지난 16세기 후반에야 반펠라기우스주의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 이름이 공정하지 않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갈리아의 수도사들은 스스로 펠라기우스에 반대하는 정통 신자로 여겼고,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회개를 부르는 성경의 초대가 헛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서라 …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서리라"고 하십니다 (슥 1:3). 그러나 교회는 결국 성경이 그 돌아섬의 시작까지 하나님께 돌린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와 오랑주 공의회

6세기 초 논쟁이 다시 불붙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과 로마를 오가던 이른바 스키티아 수도사들과 북아프리카 루스페의 감독 풀겐티우스가 파우스투스의 책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갈리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을 이어받은 이가 아를의 감독 카이사리우스(재임 502년 무렵–542년)였습니다. 그는 레랭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살았고, 아를에서 아프리카 출신의 학자 율리아누스 포메리우스에게 배웠으며, 감독이 된 뒤에는 평범한 회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로 이름이 났습니다.

529년 7월, 갈리아의 총독 리베리우스가 오랑주에 세운 교회의 봉헌식에 카이사리우스를 비롯한 열네 명의 감독이 모였습니다. 같은 곳에서 441년에도 공의회가 열린 적이 있어, 이 회의를 흔히 제2차 오랑주 공의회라고 부릅니다. 서문은 그때 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하여 ‘너무 경솔하고 보편적 신앙의 규범에 맞지 않는 견해’를 가진 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도좌가 우리에게 보낸 몇 개의 조항’을 모든 사람이 지키도록 공포하고 서명한다고 밝힙니다 서문. 많은 학자는 그 경위를 이렇게 재구성합니다. 카이사리우스가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서 뽑은 조항들을 로마에 보냈고, 교황 펠릭스 4세가 이끌던 로마 교회는 주로 프로스페르의 문장 모음에서 뽑은 조항들을 보내왔으며, 카이사리우스가 이 둘을 다듬어 공의회에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맺음말 끝에는 이 정의가 ‘성직자들뿐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치유가 되기를’ 바라므로 봉헌식에 함께한 고명한 사람들도 서명하게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맺음말. 감독들만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서명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오랑주는 한 지방의 작은 회의였고, 갈리아의 감독들이 모두 그에게 동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리우스의 전기에는 그의 은혜론을 문제 삼은 감독들이 발랑스에서 회의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회의가 오랑주보다 앞섰는지 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카이사리우스가 로마에 확인을 구하자, 교황 보니파시오 2세는 531년 편지로 이 고백이 교부들의 보편적 규범에 맞는다고 인준했습니다. 이 인준으로 오랑주의 결정은 한 지방 회의의 결정을 넘어서는 무게를 얻었습니다.

결정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1조부터 제8조까지는 ‘누구든지’로 시작하여 오류를 하나씩 물리칩니다. 1–2조는 펠라기우스에 맞서 타락의 깊이를 말하고, 3–8조는 갈리아의 물음에 답하여 은혜를 구하는 일,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믿음의 시작, 복음에 동의하는 일, 세례에 나아오는 일이 모두 은혜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제9조부터 제25조까지는 저마다 제목을 단 짧은 문장들로, 대부분 프로스페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서 뽑은 문장들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카이사리우스가 쓴 것으로 보이는 맺음말이 앞의 내용을 하나의 정의로 묶습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오랑주가 되풀이하는 말은 하나, 은혜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은 뒤에 은혜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먼저 와서 사람으로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제3조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이 간구할 때 주어진다고 말하는 이는 ‘은혜 자체가 우리로 은혜를 간구하게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며 이사야의 말씀을 듭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이방인을 부르신 하나님의 일에 적용했습니다.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롬 10:20).

제4조는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의지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소원 자체를 성령께서 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 그대로입니다.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빌 2:13). 이 조항이 함께 드는 잠언 8:35의 ‘의지는 주께로부터 예비된다’는 말은 헬라어 칠십인역을 따른 옛 라틴어 성경의 읽기여서, 히브리어 본문을 따른 흠정역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결정의 중심은 제5조입니다. 제목이 그 뜻을 줄여 말합니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난다는 것.’ 믿음이 자라는 것만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과 ‘믿고자 하는 마음 자체도’ 본성에 심겨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불신앙에서 믿음으로, 불경건에서 경건으로 바로잡으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이 조항은 바울의 세 말씀을 드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엡 2:8-9

조항은 믿음이 본성에서 난다고 말하는 이들은 교회 밖의 모든 사람을 어떤 의미에서 ‘신자’로 만드는 셈이라고 덧붙입니다. 믿음이 모든 사람에게 본래 있는 능력이라면 믿음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7조와 제8조는 같은 진리를 복음을 듣는 자리에 적용합니다.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진리에 동의하고 진리를 믿는 기쁨을 주시는 성령의 조명과 감동’ 없이는 복음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15:5). 제8조는 어떤 이는 긍휼로 구원받고 다른 이는 자유의지로 세례의 은혜에 이른다는 절충도 물리칩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도’ 아버지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내가 일으키리라.

요 6:44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을 풀며 "아무도 내가 믿었으므로 그분이 나를 부르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행하는 긍휼이 그를 불러 믿게 한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 ‘앞서는 은혜’, 곧 선행 은총을 제14조는 시편에서 읽습니다. 흠정역은 그 구절을 "내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나보다 앞서 가시리니"라고 옮기고 (시 59:10), 라틴어 시편은 이를 그분의 긍휼이 나보다 앞서리라고 읽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와 우리를 맞으십니다.

둘째 부분의 문장들은 같은 진리를 여러 쪽에서 비춥니다. 은혜는 공로에 대한 값이 아닙니다. 행한 선행 때문에 상이 마땅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받을 것이 아닌 은혜가 앞서서 선행을 행할 수 있게 한다’고 제18조는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의 지금 모습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선물로 장차 될 모습 때문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로로 지금 있는 모습 때문이 아니다.

오랑주 공의회 결정 제12조

은혜는 믿음의 시작에서 멈추지도 않습니다. 제9조는 ‘우리가 선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셔서 우리로 일하게 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도 끝까지 견디도록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제10조. 서원조차 받은 것을 돌려 드리는 일이어서, 제11조는 다윗의 기도를 듭니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니 우리가 주의 것에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14). 마지막 제25조는 사랑까지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아직 그분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던 때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성령께서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으셨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롬 5:5

맺음말의 정의, 그리고 말하지 않는 것

키 작은 남자가 여리고 길가의 가지가 넓게 퍼진 무화과나무에 높이 올라가 몸을 내밀고 길을 내려다보고, 그 밑으로 사람들이 뒷모습을 보이며 길을 메우고 지나갑니다.
여리고 길가의 큰 나무에 올라 아래 무리를 내려다보는 사람

맺음말은 앞의 내용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곧 첫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자유의지가 너무나 기울어지고 약해져서, 그 후로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그보다 앞서지 않으면 아무도 마땅히 해야 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랑주 공의회 결정 맺음말

오랑주는 자유의지가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기울어지고 약해져서’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원하고 선택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은혜가 앞서지 않으면 마땅히 해야 할 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맺음말은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 같은 옛 조상들의 믿음도 본성의 선함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졌다고 말하고, 끝에서 세 사람을 예로 듭니다. 주께서 낙원으로 부르신 강도, 천사가 찾아간 백부장 고넬료, 주님을 집에 모신 삭개오입니다. 그들의 믿음도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너그러우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강도와 삭개오는 카시아누스가 사람의 뜻이 먼저 움직인 예로 든 인물들이니, 공의회는 상대가 기대던 바로 그 본문으로 답한 것으로 보입니다. 삭개오가 나무에 오르기 전에 주님은 이미 그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눅 19:10).

맺음말은 세례도 말합니다. 세례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가지는 은혜는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고, ‘세례로 은혜를 받은 후에는, 세례받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협력으로, 신실하게 수고하기를 원한다면, 영혼의 구원에 속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고 또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라고 해서 수고가 쓸모없어지지 않는다는, 갈리아 수도사들의 염려에 대한 대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매튜 헨리도 빌립보서 2:13을 두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을 소생시키고 그것에 종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오랑주는 세례를 은혜가 주어지는 자리로 보는 6세기 교회의 눈으로 말합니다. 제13조도 ‘첫 사람 안에서 약해진 의지의 선택은 세례의 은혜로가 아니면 회복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와 루터교회는 지금도 세례로 중생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개혁교회는 세례를 은혜 언약의 표와 인으로 고백하며, ‘세례의 효력은 그것이 집행되는 그 순간에 매여 있지 않다’고 하면서도 이 규례를 바르게 쓸 때 약속된 은혜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성령으로 참으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6항.

예정에 대하여 맺음말은 한 가지만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악에 예정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 그러한 악한 교리를 믿으려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전적으로 혐오하며 그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맺음말

짧은 문장이지만, 흔히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사람을 악으로, 곧 죄로 몰아가신다는 생각을 물리친 것으로 읽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약 1:13). 공의회는 그 이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들을 생명에 예정하신다는 것이나 다른 이들을 지나치신다는 것, 은혜가 반드시 이긴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의하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는 오랑주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은 받아들이면서도 예정에 관한 그의 말년 가르침은 정의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개혁교회의 고백은 이 점에서 더 나아갑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 3항은 어떤 이들은 영생에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죽음에 미리 정해졌다고 고백하고, 도르트 신경 첫째 교리 15항은 다른 이들이 영원한 작정 가운데 간과되어 ‘그들이 스스로 고의로 빠져든 공통된 비참 속에’ 남겨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두 고백 모두 하나님이 사람을 죄로 몰아가신다는 생각은 분명히 물리칩니다. 도르트는 이 작정이 ‘결코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지 않으며(그런 생각 자체가 신성모독이다)’라고 말하고, 웨스트민스터는 하나님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정하셨으나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시는 것도 아니고’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3장 1항. 하나님이 지나치신 이들을 진노에 처하도록 정하신 것도 그들을 죄로 몰아넣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리하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3장 7항. 한편 루터교회의 일치신조는 누구도 멸망으로 예정되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일치신조 11조, 가톨릭 교회와 웨슬리 전통도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에 미리 정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차이는 오랑주가 풀어 주지 않으며, 저마다 성경을 읽는 방식에서 갈립니다. 그러나 모든 전통은 오랑주와 함께,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아니시며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사악한 자가 자기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겔 33:11). 견해들은 은혜와 선택 과와 예정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잊혔다가 다시 읽힌 결정

오랑주의 결정이 곧바로 서방 교회의 상식이 된 것은 아닙니다. 중세에는 이 결정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결정의 본문을 알지 못했다고 보는데, 그 역시 타락한 사람은 은혜 없이 영생에 이르는 선을 원하거나 행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6세기에 공의회 문서들이 인쇄되어 널리 읽히면서 오랑주는 다시 인용되기 시작했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저자들이 모두 이 공의회를 증인으로 불렀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화에 관한 교령(1547)은 아담의 죄 뒤에도 자유의지가 없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힘이 약해지고 기울어졌다고 말하는데, 이는 오랑주 맺음말의 말을 거의 그대로 되울립니다. 같은 교령은 성령의 앞선 감동과 도우심 없이는 아무도 마땅히 믿거나 소망하거나 사랑하거나 회개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신학자들도 사람의 의지가 은혜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가르침을 반박할 때 이 공의회를 옛 교회의 증언으로 들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신앙고백들도 같은 것을 저마다의 말로 고백합니다. 잉글랜드 교회의 39개 신조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로 선한 의지를 가지게 하고, 우리가 그 선한 의지를 가질 때에 우리와 함께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할 힘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39개 신조 10조. 도르트 신경은 은혜가 의지의 움직임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생각을 물리치며 ‘옛 교회는 이 펠라기우스파의 교리를 사도의 말씀에 따라 오래전에 정죄하였다’고 말합니다 셋째·넷째 교리 오류 배척 9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타락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회심하거나 회심을 준비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9장 3항.

다만 가톨릭과 개신교는 같은 결정을 다르게 읽어 왔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황이 인준한 이 결정을 교회의 신앙을 표현한 권위 있는 문서로 받으며, 맺음말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협력’에서 은혜에 응답하는 사람의 협력을 봅니다. 개신교는 은혜가 공로에 앞선다는 고백에서 ‘오직 은혜’의 옛 증언을 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과 참고). 정교회는 이 서방의 지방 회의를 자기 표준으로 삼지 않고 카시아누스를 성인으로 기리지만, 은혜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결정을 읽는 이는 먼저 겸손을 배웁니다. 오랑주는 은혜를 설명하기보다 은혜 앞에 무릎 꿇게 합니다. 하나님을 찾던 첫 마음, 복음을 듣고 기뻐한 그 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모두 받은 것이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감사와 기도입니다. 그렇다고 오랑주는 사람을 게으르게 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수고를 없애지 않고 일으켜 세웁니다. 제6조가 드는 바울의 고백이 그 두 가지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0

은혜에 관한 더 쉬운 설명은 은혜란 무엇인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처

  1. 펠라기우스, 데메트리아스에게 보낸 편지 413
  2. 아우구스티누스, 본성과 은총 415
  3. 카르타고 공의회, 펠라기우스주의에 관한 결정 418
  4. 아우구스티누스, 성도의 예정
  5. 루터교, 일치신조 11 (1577)
  6.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읽기
  7.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1547

본문

라틴어 본문과 서명은 싣지 않았습니다.

서문

하나님의 긍휼과 부르심으로, 지극히 고명한 총독이요 귀족인 우리 아들 리베리우스가 경건한 신심으로 오랑주 시에 세운 교회의 봉헌식에 우리가 모였을 때, 교회의 규율에 속한 일들에 관하여 우리 가운데 영적인 토론이 일어났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그 단순함 때문에 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하여 너무 경솔하고 보편적 신앙의 규범에 맞지 않는 견해를 가지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소식이 우리 귀에 들려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좌의 권고와 재가를 받아, 사도좌가 우리에게 보낸 몇 개의 조항을 모든 사람이 지키도록 공포하고 거기에 우리의 서명을 덧붙이는 것이 옳고 합당하다고 여겼다. 이 조항들은 특히 이 문제에 관하여 옛 교부들이 그릇된 견해를 가진 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성경의 여러 책에서 모은 것이다. 지금까지 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하여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은 사람은 이것을 읽고 지체 없이 보편적 신앙에 부합하는 것으로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영어 원문

When, by the mercy and at the call of God, we had assembled to the dedication of the church which the most illustrious prefect and patrician, our son Liberius, built out of devout piety in the town of Orange, and a spiritual discussion had arisen among us concerning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rule of the Church, it came to our hearing that there were some who were inclined in their simplicity to hold too careless opinions, and not in accordance with the rule of the Catholic faith, concerning grace and free-will. Wherefore it seemed to us right and reasonable, with the advice and sanction of the Apostolic See, that we should publish for all to hold, and subscribe our signatures to, a few articles sent to us by the Apostolic See which were collected, on this subject especially, from the volumes of the Holy Scriptures by the early Fathers to teach those who hold heterodox opinions. Having read these, let him who has not hitherto believed what he ought concerning grace and freewill without delay turn his mind to what accords with the Catholic faith.

제1조 아담의 죄로 몸만이 아니라 영혼도 해를 입었다는 것

누구든지 아담의 범죄의 허물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 전체, 곧 몸과 영혼이 더 나쁘게 변하였음을 부인하고, 영혼의 자유는 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으며 몸만 부패에 굴복하게 되었다고 믿는다면, 그는 펠라기우스의 오류에 속은 것이며,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 하고,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주어 순종하게 하면 너희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며, 또 “사람이 누구에게 정복되면 바로 그 사람에게 속박되느니라” 하는 성경을 거스르는 것이다.

영어 원문

That not the body only, but the soul also was injured by the sin of Adam

If any one denies that the whole of human nature, i.e., in body and soul, was changed for the worse by the offence of Adam's transgressions, but believes that while the liberty of the soul remained uninjured, the body only became liable to corruption, he is deceived by the error of Pelagius, and contradicts the Scripture which says, "the soul which has sinned itself shall die," and "Do ye not know that to whom ye show yourselves slaves to obey, his slaves ye are to whom ye obey?" and, "By whom any one is overcome, his slave he is also made?"

제2조 아담의 죄가 자기 자신만 해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전해졌다는 것

누구든지 아담의 범죄가 그 자신만 해쳤고 그의 후손은 해치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나, 적어도 죄의 형벌인 몸의 죽음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전해졌고 영혼의 죽음인 죄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단언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불의를 돌리는 것이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하고 말하는 사도를 거스르는 것이다.

영어 원문

That the sin of Adam did not hurt himself only, but passed on to his descendants also

If any one asserts that Adam's transgressions hurt himself alone, and not also his progeny, or declares that at any rate only bodily death, which is the punishment of sin, and not sin also, which is the death of the soul, by one man passed on all the human race, he will be ascribing injustice to God, and contradicting the Apostle who says, "By one man sin entered into the world, and death by sin; and so death passed upon all men, because all have sinned."

제3조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간구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 자체가 사람으로 은혜를 간구하게 한다는 것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이 간구할 때에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도리어 은혜 자체가 우리로 은혜를 간구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또는 그의 말을 인용하여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하고 말하는 사도를 거스르는 것이다.

영어 원문

That the grace of God is not given at man's call, but itself makes man call for it

If any one says that the grace of God can be conferred at man's call, and not rather that grace itself makes us call for it, he contradicts the prophet Isaiah, or the Apostle who quotes his words, "I was found of those who were not seeking me; I appeared openly to those who were not asking for me."

제4조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의지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그것을 예비하신다는 것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의지를 기다리신다고 주장하고, 도리어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 자체가 성령께서 부어 주시고 역사하심으로 우리 안에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솔로몬을 통하여 의지는 주께로부터 예비된다고 말씀하시는 성령 자신을 거스르고,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하는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사도를 거스르는 것이다.

영어 원문

That God to cleanse us from sin does not wait for, but prepares our will

If any one contends that God to cleanse us from sin waits for our will, and does not rather allow that our very wish to be cleansed is put into us by the infusion and operation of the Holy Spirit, he resists the Spirit Himself, who says by Solomon, "The will is prepared by the Lord," and the Apostle who teaches the wholesome doctrine, "It is God who worketh in you both to will and to perform for His good will."

제5조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난다는 것

누구든지 믿음의 성장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시작도, 그리고 우리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고 거룩한 세례의 중생에 이르게 하는 믿고자 하는 마음 자체도, 은혜의 선물로 말미암는 것(곧 우리의 의지를 불신앙에서 믿음으로, 불경건에서 경건으로 바로잡으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본성으로 우리 안에 심겨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도의 가르침의 대적자임이 드러난다. 복된 바울은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이것을 나는 확신하노라” 하고, 또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도 주께서 그분을 대신해서 너희에게 주셨나니” 하며, 또다시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본성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어떤 의미에서 ‘신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영어 원문

That the beginning of faith is not of ourselves, but of the grace of God

If any one says that just as the increase, so also the beginning of faith, and the very feeling of belief by which we believe on Him who justifies the "impious" man, and come to the Regeneration of sacred Baptism, is not by the gift of grace (i.e., by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correcting our will from infidelity to faith, from impiety to piety), but is implanted in us by nature, he is proved an adversary to the doctrines of the Apostle; for the blessed Paul says, "We trust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perfect it even unto the day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also, "To you it was given in behalf of Christ, not only to believe in Him, but also to suffer for Him;" and again, "By grace ye were saved by faith, and that not out of yourselves, for it is the gift of God." For those who say that the faith by which we believe in God is by nature, define all those who do not belong to the Church of Christ as in a certain sense "faithful."

제6조 우리가 믿고 구할 때 하나님의 은혜 없이 긍휼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 자체가 우리로 믿고 구하게 한다는 것

누구든지 우리가 믿고, 원하고, 사모하고, 애쓰고, 수고하고, 깨어 있고, 열망하고, 찾고, 구하거나 두드릴 때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말하고, 도리어 우리가 이 모든 일을 마땅히 해야 할 대로 믿고 원하거나 행할 능력을 가지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께서 부어 주시고 감동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순종과 겸손이 은혜 자체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대신 은혜의 도움을 사람의 겸손이나 순종에 덧붙이는 보충물로 삼는다면, 그는 “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라고 말하는 사도를 거스르는 것이다.

영어 원문

That without the grace of God mercy is not bestowed upon us when we believe and seek for it; rather it is grace itself which causes us to believe and seek for it

If any one says that without the grace of God mercy is bestowed upon us by God when we believe, wish, long for it, strive, toil, watch, desire it, seek, ask for it, or when we knock, and does not rather acknowledge that it is by the infusion and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within us that we believe, wish, or have the power of doing all these things as we ought, and puts the help of grace as a supplement to human humility or obedience, instead of acknowledging that obedience and humility are the gift of grace itself, he resists the Apostle who says, "What hast thou which thou hast not received?" and,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제7조 은혜 없이 본성의 힘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속한 어떤 선한 것도 생각하거나 선택할 수 없다는 것

누구든지 모든 사람에게 진리에 동의하고 진리를 믿는 기쁨을 주시는 성령의 조명과 감동 없이 본성의 힘으로 영생의 구원에 속한 어떤 선한 것을 합당하게 생각하거나 선택할 수 있다거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곧 복음의 선포에 동의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면, 그는 이단의 영에 속은 것이며, 복음서에서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또 “우리는 어떤 일이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으로 생각할 만큼 능력이 있지 아니하며 오직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하는 사도의 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영어 원문

That by the powers of nature without grace we are not able to think or choose any good thing pertaining to our salvation

If any one affirms that we can fitly think or choose any good thing pertaining to the salvation of eternal life, or agree to the saving, i.e., the evangelical, preaching by the strength of nature without the illumination and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who gives to all pleasure in agreeing and believing the truth, he is deceived by an heretical Spirit, not understanding the words of God, who says in the gospel,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and those again of the Apostle, "Not that we are fitted to think anything of ourselves as from ourselves, but our sufficiency is from God."

제8조 자유의지로는 아무도 세례의 은혜에 이를 수 없다는 것

누구든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로 그 은택을 받는다고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자유의지로(이 자유의지는 첫 사람의 범죄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 안에서 손상되었음이 알려져 있다) 세례의 은혜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참된 믿음에 속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는 모든 사람의 자유의지가 첫 사람의 죄로 약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나, 적어도 자유의지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도 스스로 영원한 구원의 신비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만 손상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가 얼마나 그릇된지는 주께서 친히 증명하신다. 그분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자기에게 올 수 없다고 증언하시며, 또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살과 피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고 말씀하신다. 사도도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 하고 말한다.

영어 원문

That by free choice no one can come to the grace of Baptism

If any one while allowing that some receive that benefit by God's mercy, contends that others however can come to the grace of baptism by their free choice (which in all who were born after the transgression of the first man is known to have been impaired) is proved not to belong to the true faith. For he asserts that the free choice of all men was not weakened by the sin of the first man; or at least, thinks that it was only so far injured as to admit of the possibility of some being able to seek for themselves the mystery of eternal salvation without the revelation of God. How false this opinion is is proved by the Lord Himself, who testifies not that some, but that no one can come to Him unless the Father draw him; just as he says also to Peter, "Blessed art thou, Simon Barjona, because flesh and blood hath not revealed it to thee, but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and the Apostle, "No man can say the Lord Jesus, except by the Holy Spirit."

제9조 우리가 선행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관하여

우리가 바르게 생각하고 우리의 발걸음을 거짓과 불의에서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셔서 우리로 일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영어 원문

Of the help of God, by which we do good works

It is of God's gift when we think rightly, and keep our steps from falsehood and unrighteousness; for as often as we do good, God works in us and with us that we may work.

제10조 모든 사람이 항상 간구해야 할 하나님의 도우심에 관하여

거듭나고 거룩하게 된(치유된) 사람들도 선한 끝에 이르거나 선행 가운데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영어 원문

Of the help of God, how it is always to be implored by all

The help of God is always to be implored even by those who are reborn and sanctified (healed), that they may be able to arrive at a good end, or endure in good works.

제11조 서원의 의무에 관하여

누구든지 자기가 서원하려는 것을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합당하게 서원할 수 없다. 기록된 바 “우리가 주의 것에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한 것과 같다.

영어 원문

Of the obligation of vows

No one can properly vow anything to God, without having received what he would vow from Him, as it is read, "We give Thee what we have received from Thy hand."

제12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근거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선물로 장차 될 모습 때문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로로 지금 있는 모습 때문이 아니다.

영어 원문

On what ground God loves us

God loves us for what we shall be by His gift, not for what we are by our own merit.

제13조 자유의지의 회복에 관하여

첫 사람 안에서 약해진 의지의 선택은 세례의 은혜로가 아니면 회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이므로, 그것을 주실 수 있었던 분이 아니면 아무도 되돌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

영어 원문

Of the restoration of free choice

The choice of the will, weakened in the first man, cannot be restored but by the grace of baptism; for being lost, it cannot be given back except by Him who could give it. Wherefore the truth Himself says: "If the Son shall make you free, ye shall be free indeed."

제14조 비참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보다 앞선다는 것

어떤 비참한 사람도 하나님의 긍휼이 그보다 앞서지 않으면 어떤 비참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시편 기자가 주께 주의 긍휼이 속히 우리보다 앞서 가게 해 달라고 구하고, 또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보다 앞서 가시리라고 말한 것과 같다.

영어 원문

That to be freed from misery we are prevented by the mercy of God

No miserable man is freed from any misery whatever, except he also is prevented by the mercy of God, as the Psalmist says, "Let Thy mercy speedily go before us, O Lord;" and again, "As for my God, His mercy will prevent me."

제15조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는 더 좋게 변화된다는 것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습에서 변하였으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더 나쁘게 변하였다. 신자는 죄가 만들어 놓은 모습에서 변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 좋게 변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첫 범죄자의 변화였고, 후자는 지존자의 오른손의 변화이다.

영어 원문

That through the grace of God a faithful man is changed for the better

Adam was changed from that which God formed him, but for the worse through his iniquity; a faithful man is changed from that which sin has wrought, but for the better through the grace of God. The former therefore was the change of the first transgressor; the latter is "the change of the right hand of the Most High."

제16조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것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

아무도 자기에게 있는 줄로 여기는 것을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해서는 안 되며, 밖으로부터 문자가 그에게 읽히도록 나타났거나 들리도록 울렸기 때문에 그것을 받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사도가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고, 또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그 근원에서 그것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그 근원에서 그것을 가졌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참으로 그것을 가지지 않았거나, 자기에게 있는 줄로 여기는 것을 빼앗긴다.

영어 원문

That we should not boast of what we have, because it is of God

Let no one boast of that which he seems to have, as though he had not received it, or think that he has therefore received it, because a letter from without has either appeared for him to read, or sounded for him to hear. For, as the Apostle says, "If righteousness is by the law, then Christ died in vain." "Ascending up on high, he made captivity captive, He gave gifts to men." From that source he has it, whoever has ought; and whoever denies that he has it from that source, either has it not truly, or that which he seems to have is taken away from him.

제17조 그리스도인의 용기에 관하여

이교도의 용기는 세상적인 욕망에서 나오지만,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이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의지의 선택으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다.

영어 원문

Of Christian courage

The courage of heathens is due to worldly desire; but the courage of Christians to the love of God, which is spread abroad in our hearts, not through the choice of the will which is in us, but by the Holy Spirit which has been given us.

제18조 어떤 공로도 은혜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

행한 선행을 근거로 은혜보다 앞서는 어떤 공로에 대해서도 상이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땅히 받을 것이 아닌 은혜가 앞서서 선행을 행할 수 있게 한다.

영어 원문

That grace is not prevented by any merits

A reward is not owed for any merits preventing grace on the ground of good works done, but grace which is not owed precedes to enable them to be done.

제19조 하나님의 긍휼로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

인간 본성은 비록 그것이 지음 받은 그 온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하더라도, 그 창조주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자신을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받은 구원을 지킬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할 능력을 가지겠는가?

영어 원문

That no man is saved except by the mercy of God

Human nature, even though it remained in that integrity in which it was made, could in no way preserve itself without the help of its Creator. Since then without the grace of God it cannot keep the salvation which it has received, how without the grace of God will it have the power of restoring what it has lost?

제20조 사람은 하나님 없이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사람이 하지 않는 선한 일을 많이 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행할 능력을 주시지 않는 선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영어 원문

How man can do no good thing without God

God does many good things in man which man does not do; but man does no good things which God does not give him the power of doing.

제21조 본성과 은혜에 관하여

사도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고 지극히 참되게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칭송되고 받아들여지는 은혜가 곧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만일 의가 본성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지극히 참되게 말할 수 있다. 앞의 경우에는 율법이 있었으나 그것이 의롭게 하지 못하였고, 뒤의 경우에는 본성도 있었으나 그것이 의롭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아니니, 이는 율법에 대하여 “나는 폐하러 오지 아니하고 성취하러 왔노라” 하고 말씀하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성취되고, 아담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본성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고 말씀하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회복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영어 원문

Of nature and grace

Just as the Apostle says most truly to those who, wishing to be justified in the law, have fallen from grace, "If justice is in the law, then Christ died in vain;" so to those who think that nature is the grace which is commended and received by faith in Christ, it is most truly said, "If justice is by nature, then Christ died in vain." For in the first case there was law and it did not justify, in the second there was nature as well, and it did not justify. Therefore Christ did not die in vain, in order that both the law might be fulfilled by Him, who said, "I came not to destroy the law, but to fulfil"; and nature, destroyed through Adam, might be restored by Him who said that He "came to seek and to save what was lost."

제22조 사람에게 본래 속한 것들에 관하여

어떤 사람도 거짓과 죄 외에는 자기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떤 진리와 의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것을 그 샘에서 얻은 것이니, 우리는 이 광야에서 그 샘을 목말라 사모하여, 물방울과 같은 그것으로 새 힘을 얻어 길에서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

영어 원문

Of the things which properly belong to men

No man has anything of his own but falsehood and sin; but if any man has any truth and justice, he has it from that fountain which we ought to thirst for in this desert, that being refreshed by it as with drops of water we may not faint by the way.

제23조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에 관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방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할 때에는, 비록 기꺼이 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로는 그들의 의지를 예비하시고 명하시는 그분의 뜻이다.

영어 원문

Of the will of God and man

Men do their own will, not that of God, when they do that which is displeasing to God; but when they do (that which they will) in such a way as to serve the Divine will, although they act willingly, it is really the will of Him by whom their will is prepared and ordered.

제24조 포도나무의 가지들에 관하여

가지들은 포도나무에 아무것도 주지 않고 포도나무에게서 생명의 힘을 받는 방식으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며, 포도나무는 가지들에게 생명의 양분을 공급하되 가지들에게서 그것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가지들 안에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거하시게 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둘 다 제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지 그리스도께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지가 잘려 나가면 살아 있는 뿌리에서 다른 가지가 돋아날 수 있으나, 잘려 나간 가지는 뿌리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영어 원문

Of the branches of the vine

The branches are in the vine in such a way that they bestow nothing on the vine, but from it receive the power of life; in such a way is the vine in the branches, that it supplies them with the nourishment of life, but does not receive it from them. In the same way to have Christ abiding in them and to abide in Christ were both of advantage to the disciples, not to Christ. For if a branch be cut off, another may spring up from the living root; but the branch which is cut off cannot live without a root.

제25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에 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아직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친히 우리에게 그분을 사랑할 능력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던 때에 우리는 사랑을 받았으니, 이는 그분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랑이 성부와 성자의 영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우리는 그 영을 성부와 성자와 함께 사랑한다.

영어 원문

Of the love by which we love God

To love God is entirely God's gift. He Himself has given us the power of loving Him, who loves us, even when we have not yet loved Him. When we were displeasing Him we were loved, that the power of pleasing Him might be wrought in us, for charity is spread abroad in our hearts by the Spirit of the Father and the Son, whom with the Father and the Son we love.

맺음말

그러므로 위에 말한 성경의 말씀들, 또는 옛 교부들의 정의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믿어야 한다. 곧 첫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자유의지가 너무나 기울어지고 약해져서, 그 후로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그보다 앞서지 않으면 아무도 마땅히 해야 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로운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옛 조상들의 온 무리가 사도 바울이 칭찬하는 그 영광스러운 믿음을 처음에 아담 안에 심겨 있던 본성적 선함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 주께서 오신 후에도 세례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이 이 은혜를 자유의지에 달린 것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너그러우심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가진다는 것을 알고 또 믿는다. 이것은 이미 여러 번 말한 바와 같고,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도 주께서 그분을 대신해서 너희에게 주셨나니” 하고, 또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 하며, 또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하고 가르친다. 또 사도는 자기에 대하여, 자기가 충성된 자가 되도록 긍휼을 입었다고 말한다. 그는 충성되었기 때문에가 아니라 충성된 자가 되도록 긍휼을 입었다고 하였다. 또 그는 “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하고, 또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오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거니와” 하며, 또 “하늘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고 말한다. 은혜를 증명하기 위하여 제시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간결함을 위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적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더 많은 것으로도 분명히 설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보편적 신앙에 따라 이것을 믿는다. 곧 세례로 은혜를 받은 후에는, 세례받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협력으로, 신실하게 수고하기를 원한다면, 영혼의 구원에 속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고 또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악에 예정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 그러한 악한 교리를 믿으려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전적으로 혐오하며 그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우리는 또한 이 건전한 교리를 고백하고 믿는다. 곧 모든 선한 일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시작하고 그 후에 하나님의 긍휼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먼저, 앞서는 아무런 선한 공로 없이, 우리에게 그분을 믿는 믿음과 그분을 향한 사랑을 불어넣으셔서, 우리로 신실하게 세례의 거룩한 규례를 구하게 하시고, 세례 후에는 그분의 도우심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매우 분명하게 따라 나오는 것은, 주께서 낙원의 집으로 다시 부르신 강도의 믿음과, 주의 천사가 보내심을 받은 백부장 고넬료의 믿음과, 우리 주를 친히 영접하도록 허락받은 삭개오의 믿음, 곧 지극히 칭찬할 만한 그 믿음이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너그러우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위에 제시한 옛 교부들과 우리 자신의 정의가 성직자들뿐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치유가 되기를 바라고 원하므로, 앞서 말한 축일에 우리와 함께 모인 고명하고 귀한 사람들도 자기 손으로 거기에 서명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영어 원문

And so, in accordance with the above-mentioned opinions from the holy Scriptures, or the definitions of the ancient fathers, we ought by God's mercy both to teach and believe this, that through the sin of the first man free choice was so biassed and weakened that no one can afterwards either love God as he ought, or believe in God, or work for God's sake what is good, unless the grace of Divine mercy prevents him. Wherefore just Abel and Noe and Abraham and Isaac and Jacob, and the whole multitude of old fathers, we believe, had not that glorious faith which the Apostle Paul praises through natural goodness which was first implanted in Adam, but that it was bestowed upon them by the grace of God. This grace, even after the advent of our Lord, we know and believe that all who desire to be baptized have, not as dependent on free choice, but that it is bestowed upon them by the bounty of Christ, according to what has often been already mentioned, and what the Apostle Paul teaches, "To you it has been given for Christ, not only to believe on Him, but also to suffer for Him;" and again, "God who has begun in you a good work, will perfect it until the day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again, "By grace were ye made whole by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and what the Apostle says of himself, "I obtained mercy, that I might be faithful;" he did not say, "because I was," but "that I might be;" and again, "What hast thou which thou hast not received?" and again, "Every good gift and every perfect gift is from above, coming down from the Father of lights;" and again, "No one has anything unless it has been given him from above." There are numberless passages of Scripture which may be brought forward to prove grace, but for the sake of brevity we have omitted to mention them, because he who is not satisfied with few will certainly not be convinced by more.

This too we believe, according to the Catholic faith, that when grace has been received by baptism, all baptized persons, by the help and co-operation of Christ, may and ought, if they wish to labour faithfully, accomplish all things which pertain to the salvation of the soul. But that any are by the Divine power predestined to evil, we not only do not believe, but if there are any who would believe such an evil doctrine, we altogether detest them and anathematize them.

We also profess and believe this wholesome doctrine, that in every good work it is not ourselves who begin and are afterwards helped by the mercy of God, but God Himself first, without any precedent good merits, inspires us with His faith and love, that we may faithfully seek the sacred ordinances of baptism, and after baptism may by His help accomplish those things which are pleasing to Him. From this it most clearly follows that we should believe that the very praiseworthy faith of the robber whom the Lord recalled to the home of Paradise, and of Cornelius, the centurion, to whom the angel of the Lord was sent, and of Zacchæus, who was permitted to entertain our Lord Himself, was not of nature, but was given by the bounty of Divine grace.

And because we desire and wish the definition of the early fathers and of ourselves, above given, to be a healing not only to clergy but also to laity, we have thought good that the illustrious and noble men who have come together with us to the before-mentioned feast, should subscribe to it with their own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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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공개 저작물(Creeds.json; 필립 샤프, 『기독교 신조집』, 1877; 『공동기도서』, 1863; F. H. 우즈 옮김, 1882; 『콘코르디아 트리글로타』, 1921). 사도신경은 전해 내려온 우리말 고백문.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