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11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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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 논쟁과 슬라브 선교

8세기 비잔티움의 황제들이 이콘을 없애게 하자 수도사들이 맞섰고,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콘에 드리는 공경과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구별했습니다. 863년 키릴루스와 메토디오스는 모라비아의 슬라브인에게 그들의 말로 성경과 예배를 전했고, 988년 키예프의 블라디미르와 백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금빛 후광을 두른 두 성직자가 나란히 서서, 한 사람은 슬라브 문자가 적힌 두루마리를, 다른 사람은 펼친 책을 들고 있는 이콘.
벨코 일리예프(추정), 〈성 키릴루스와 메토디오스〉 이콘, 1898년 이전, 코즐로두이 성삼위 교회 · 출처

연표에서 보기

이콘을 둘러싼 백 년

8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와 집에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성인들을 그린 이콘(성화상)이 많았고, 신자들은 그 앞에 촛불을 켜고 입 맞추며 기도했습니다. 720년대에 황제 레오 3세가 이콘을 문제 삼기 시작했고, 그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는 754년 히에레이아 궁전에 감독들을 모아 이콘을 우상으로 정죄하게 했습니다. 이콘을 지킨 수도사들은 매를 맞고 쫓겨났으며, 수도사 스테파노스처럼 죽임을 당한 이도 있었습니다. 이콘을 없애려 한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5

왜 이 일이 그때 일어났는지는 학자들의 의견이 갈립니다. 아랍 군대에 거듭 진 것을 하나님의 진노로 읽었다고 보는 이도 있고, 형상을 멀리하는 이슬람과 유대교의 영향을 드는 이도 있습니다. 이콘을 없앤 이들의 글은 대부분 없어져서,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주로 반대편의 기록으로, 특히 787년 공의회가 반박하려고 옮겨 실은 754년의 결정문으로 압니다.

이콘을 지킨 이들의 근거는 성육신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그릴 수 없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눈에 보이셨으니 그분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리프의 땅에 살아 황제의 손이 닿지 않던 다마스쿠스의 요한이 『성화상에 관한 변론』에서 이렇게 이콘을 변호했습니다 (앞의 과 이슬람의 등장과 동방 교회). 이 논쟁의 신학은 신학 과정의 수도원, 선교, 동서 교회의 분열 과에서 다룹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어린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대신해 다스리던 이레네 황후는 787년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이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콘에 입 맞추고 절하며 드리는 공경과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구별하고, 이콘을 교회에 다시 세우게 했습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성화상에 관한 정의. 그러나 공의회를 연 이레네는 797년 자기 아들의 눈을 멀게 하고 홀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815년 이콘을 없애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가 843년 테오도라 황후 때 끝났고, 정교회는 지금도 사순절 첫 주일에 이 일을 ‘정교회의 승리’로 기념합니다.

오늘 전통들이 이콘을 보는 눈

흰 회칠을 한 텅 빈 교회 안에 둥근 아치와 기둥이 높이 솟아 있고, 바닥에는 몇 사람만이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피터르 산레담, 〈위트레흐트 마리아 교회의 익랑〉, 1637년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 출처

동방의 오랜 교회인 정교회에게 이콘은 하늘로 열린 창과 같습니다. 정교회 신자들은 이콘 앞에서 기도하며 그것이 나타내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을 공경하고, 이 공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다르다고 고백합니다. 가톨릭 교회(천주교)도 이 공의회를 일곱째 보편 공의회로 받아,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 성인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별하며 성화와 성상을 둡니다.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루터교회는 예배하지 않는 한 그림과 십자가상을 교회에 둘 수 있다고 보았고, 개혁교회는 예배당에서 형상을 치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을 어떤 방법으로도 형상으로 나타내어서는 안 되며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피조물은 그릴 수 있으나 그것을 예배하거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만드는 것은 금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7문. 이 고백이 예배에서 뜻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말씀 중심의 예배 과에서 봅니다. 어느 전통도 형상을 예배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모두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다른 것은 그 경계를 어디에 두고 어떻게 지키느냐입니다.

슬라브인의 말로, 863년

862년 무렵 모라비아(오늘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땅)의 군주 라스티슬라프는 비잔티움 황제 미카엘 3세에게,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말로 참 믿음을 가르칠 교사를 보내 달라고 청했습니다. 황제는 테살로니카 출신의 형제 키릴루스(본디 이름은 콘스탄티노스)와 메토디오스를 보냈습니다. 테살로니카 둘레에는 슬라브인이 많이 살아 형제는 그 말을 알았고, 학자였던 키릴루스는 슬라브 말을 적을 글라골 문자를 만들어 복음서와 예배서를 옮겼습니다. 863년 모라비아에 간 형제는 슬라브 말로 예배를 드리며 제자들을 길렀습니다. 이 일은 그들의 제자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키릴루스의 생애와 메토디오스의 생애』가 전합니다.

오순절에 모인 무리가 저마다 "자기 자신의 말로" 제자들의 말을 듣고 놀랐듯이 (행 2:6), 슬라브인들도 처음으로 자기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들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한 것을 어찌 알리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리라.

고전 14:9

매튜 헨리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평이한 말이 공적 예배와 그 밖의 종교적 행사에 가장 적합합니다"라고 풉니다 매튜 헨리.

그러나 모라비아에 와 있던 프랑크의 성직자들은 예배를 빌라도가 십자가에 써 붙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만 드려야 한다며 반대했습니다. 『키릴루스의 생애』는 그가 베네치아에서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과 논쟁하며 고린도전서 14장을 길게 들었다고 전합니다. 867년 무렵 형제는 로마로 가서 교황 하드리아누스 2세에게 슬라브 말 예배서를 인정받았고, 키릴루스는 869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주교가 된 메토디오스는 프랑크 감독들에게 붙잡혀 여러 해 갇혔다가 교황의 개입으로 풀려났습니다.

885년 메토디오스가 죽자 그의 제자들은 모라비아에서 쫓겨났고, 노예로 팔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불가리아로 간 제자들이 슬라브 말 예배를 이어 갔고, 그곳에서 키릴루스의 이름을 딴 키릴 문자가 생겨났습니다. 정교회는 두 형제를 ‘사도와 동등한 이’로, 슬라브인의 스승으로 기립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로 기념하며, 198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들을 베네딕투스와 함께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키예프의 세례, 988년

드네프르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높은 받침대에 십자가를 든 블라디미르 대공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아래로 넓은 강이 흐른다.
포토글로브사, 〈키예프의 성 블라디미르 기념상〉, 1890–1900년 무렵 (미국 의회도서관) · 출처

키예프의 대공 블라디미르의 할머니 올가는 955년 무렵 이미 세례를 받았습니다. 1113년 무렵 키예프에서 엮은 『원초 연대기(지난 세월 이야기)』는 987년 블라디미르가 여러 신앙을 알아보려고 사절들을 보낸 일을 전합니다. 연대기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에서 예배를 본 사절들은 자기들이 하늘에 있었는지 땅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많은 역사가는 이 신앙 시험 이야기를 백 년도 더 지나 다듬어진 이야기로 봅니다. 확실한 것은 블라디미르가 988년 무렵 비잔티움 황제 바실레이오스 2세를 군대로 돕고 그 누이 안나와 혼인하며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연대기는 블라디미르가 키예프로 돌아와 페룬 신상을 강물에 던지게 하고, 내일 강에 나오지 않는 이는 부자든 가난한 이든 종이든 자기의 원수라며 백성을 드네프르 강으로 불러 세례를 받게 했다고 전합니다. 왕의 명령으로 온 백성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은 것은 그 시대 선교의 그늘이지만, 그 뒤 키예프에는 교회와 학교가 세워지고 불가리아에서 온 슬라브 말 예배가 뿌리내렸습니다. 오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교회들은 모두 이 세례에서 자기 시작을 찾고, 정교회는 블라디미르를 ‘사도와 동등한 이’로 기립니다.

이 과의 이야기는 예배의 두 선물을 보여 줍니다. 키예프의 사절들은 예배의 아름다움에서 하늘을 보았고, 모라비아의 슬라브인들은 처음으로 자기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한국어로 성경을 읽고 예배하는 것도 두 형제가 걸은 길 위에 있습니다. 이콘을 두고는 전통들의 길이 갈렸지만, 모두가 육신이 되신 말씀, 그리스도를 예배합니다. 다음 과 1054년, 동서 교회가 갈라지다에서는 두 형제를 함께 기리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가 어떻게 갈라졌는지 봅니다.

연습

  1. 연습 1 / 7

    8세기 비잔티움의 이콘 논쟁에 대해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7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정한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7

    이콘 논쟁의 사건들을 일어난 차례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7문이 형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7

    863년 모라비아에 간 키릴루스와 메토디오스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7

    형제의 슬라브 말 예배를 반대한 프랑크의 성직자들이 내세운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7

    원초 연대기가 전하는 블라디미르의 사절들 이야기에 대해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읽으면 읽음이 됩니다. 눌러서 끄고 켤 수 있습니다.

출처

  1. 다마스쿠스의 요한, 성화상에 관한 변론 1.16 — 720년대 말–730년대. 이콘을 없애려는 황제들에 맞서 쓴 세 편의 변론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그릴 수 없지만 육신으로 보이신 하나님은 그릴 수 있다고 하며, 자기는 물질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물질이 되신 물질의 창조주를 공경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라트레이아)와 공경을 구별하고, 형상에 드린 공경은 그 원형에게로 넘어간다는 바실리우스의 말을 여러 번 끌어 쓴다.
  2.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성화상에 관한 정의 787 — 성화상은 공경하되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린다고 정의했다.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받아들인다. 정의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어머니, 천사들과 모든 성인의 형상을 세워 공경하게 하되 하나님의 본성에만 속한 참된 예배(라트레이아)는 드리지 않게 하며, 형상에 드리는 공경은 그 원형에게로 넘어가니 형상을 공경하는 이는 거기 그려진 이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한다.
  3. 키릴루스와 메토디오스의 제자들, 키릴루스의 생애와 메토디오스의 생애 9세기 말 / late 9th century — 9세기 말. 두 형제의 제자들이 슬라브 말로 쓴 것으로 보이는 전기로, 모라비아의 라스티슬라프가 교사를 청한 일과 슬라브 문자와 슬라브 말 예배서를 전한다. 『키릴루스의 생애』 16장은 그가 베네치아에서 예배를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만 드려야 한다는 이들과 논쟁하며 고린도전서 14장을 길게 들었다고 전한다.
  4. 키예프의 연대기 작가들, 원초 연대기(지난 세월 이야기) 987–988 — 1113년경. 콘스탄티노플의 예배를 본 블라디미르의 사절들이 하늘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보고한 일(987년 항목)과, 블라디미르와 키예프 사람들이 세례를 받은 일(988년 항목)을 전한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