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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첫 세대의 교회: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시작하기 연표오순절에서 오늘까지, 사건과 사람으로초대 교회 30–312
- 첫 세대의 교회: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30년 무렵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한 세대 만에 사마리아와 안디옥을 지나 로마에 이르렀습니다. 64년 네로의 박해와 70년 예루살렘 함락을 지나며, 유대인 제자들의 작은 무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 박해와 순교자들 네로 뒤로 4세기 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신들과 황제에게 제사하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때때로 붙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155년 무렵 서머나의 폴리캅, 203년 카르타고의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 250년 데키우스와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지나며 교회는 순교자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기억했고, 넘어진 이들을 다시 받는 길도 배웠습니다.
- 초대 교회의 예배와 삶 예배당도 법의 보호도 없던 초대 교회는 주의 날마다 집에 모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 기도하며 떡과 잔에 감사했고, 가르침을 받은 이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디다케』의 기도와 150–155년 무렵 유스티누스가 황제에게 밝힌 예배, 역병 때 병자를 돌본 이야기는 그들이 예배와 사랑을 함께 살았음을 보여 줍니다.
- 정경과 신조와 감독 사도들이 떠난 뒤 2세기 교회는 그들에게서 받은 신앙을 어떻게 지킬지 물어야 했습니다. 110년 무렵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을 중심으로 하나 되라고 썼고, 144년 마르키온이 로마 교회와 갈라선 뒤 교회는 함께 읽어 온 책들을 더 분명히 가렸으며, 180년 무렵 이레나이우스는 성경과 신앙의 규칙과 감독들의 계승으로 사도의 신앙을 변호했습니다.
제국의 교회 313–590
- 콘스탄티누스: 박해에서 공인으로 312년 밀비우스 다리에서 이긴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 밀라노에서 그리스도인과 모든 사람에게 예배의 자유를 주었고, 325년 니케아에 감독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가 니케아의 신앙을 제국의 신앙으로 세우기까지, 교회는 박해에서 벗어났지만 권력과 묶이는 값도 치렀습니다.
- 사막과 수도원 3세기 말 이집트의 사막에서 안토니우스가 시작한 수도 생활은 파코미우스의 공동체와 동방의 바실리우스를 거쳐, 529년 무렵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투스에 이르러 서방의 모양을 얻었습니다. 수도사들은 기도와 노동, 손님 대접과 병자 돌봄, 책과 선교로 교회를 섬겼고, 종교개혁자들은 서원과 공로의 위험을 물었습니다.
- 로마의 몰락과 아우구스티누스 410년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하자 이교도들은 옛 신들을 버린 그리스도인들을 탓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으로 답했습니다. 그가 430년 반달족에게 에워싸인 히포에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서방의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감독들은 도시를 돌보고 수도사들은 배움을 지켰습니다.
- 제국 너머의 교회 4–5세기 복음은 로마의 국경 너머로도 퍼졌습니다. 330년 무렵 악숨의 에자나 왕과 프루멘티우스, 아르메니아와 405년 무렵 메스로프의 문자, 조지아의 니노, 박해를 견딘 페르시아의 동방 교회, 그리고 노예였다가 그 땅으로 돌아간 아일랜드의 패트릭이 그 이야기이며, 성경은 여러 민족의 말로 옮겨졌습니다.
중세 초기 590–1054
- 대 그레고리우스와 유럽의 선교 590년 로마의 감독이 된 대 그레고리우스는 목자로서 도시와 교회를 돌보았고, 그가 보낸 수도사들이 597년 잉글랜드의 켄트에 닿았습니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수도사들이 대륙으로 복음을 가져갔고, 800년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과 작센족의 강제 세례, 910년 클뤼니의 개혁이 이어졌습니다.
- 이슬람의 등장과 동방 교회 7세기 아랍 군대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하고 638년 무렵 예루살렘이 항복하자, 그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슬림의 다스림 아래 보호받는 백성(딤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같은 무렵 동방 교회(경교)의 알로펜은 635년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이르렀고, 그 이야기는 781년의 비석에 남았습니다.
- 성상 논쟁과 슬라브 선교 8세기 비잔티움의 황제들이 이콘을 없애게 하자 수도사들이 맞섰고,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콘에 드리는 공경과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구별했습니다. 863년 키릴루스와 메토디오스는 모라비아의 슬라브인에게 그들의 말로 성경과 예배를 전했고, 988년 키예프의 블라디미르와 백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중세 1054–1500
- 1054년, 동서 교회가 갈라지다 1054년 7월 교황의 사절들이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제단에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교서를 올려놓았고, 총대주교의 회의도 그들을 정죄했습니다. 이 일은 여러 세기에 걸친 멀어짐의 한 장면이었고, 1204년 십자군의 약탈이 상처를 깊게 했으며, 1965년 두 교회는 서로의 파문을 거두었습니다.
- 교황과 황제, 그리고 십자군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세상 권력에서 교회의 자유를 되찾으려 했고,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그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1095년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로 시작된 십자군의 무리는 1096년 라인 지방의 유대인을 죽였고, 1099년 예루살렘에서는 무슬림과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아들딸들이 저지른 이런 죄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 탁발 수도회 13세기 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카스티야의 도미니코는 수도원 담장 안이 아니라 길 위에서 가난하게 살며 복음을 전하는 형제들을 모았고, 교황은 1209년과 1216년에 그들의 삶을 인가했습니다. 이 탁발 수도회들은 도시와 대학에 복음을 전했지만, 뒷날 그 형제들 가운데서 종교재판관도 나왔습니다.
- 종교재판과 이단 12세기 서방에는 가난한 삶과 사람들의 말로 옮긴 성경을 앞세운 발도파와, 선과 악의 두 원리를 믿은 카타리파가 퍼졌습니다. 교회는 1184년 베로나 교령, 1209년 알비 십자군, 1233년부터 그레고리우스 9세가 보낸 종교재판관들로 그들을 억눌렀고, 개신교회도 이단을 불태웠으며,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리를 섬긴다며 쓴 폭력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 흑사병과 대분열, 그리고 후스 1347년부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을 앗아 갔고, 두려움 속에서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학살당했습니다. 1378년 둘로 갈린 교황청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지만, 같은 공의회는 1415년 안전 통행증을 받고 온 얀 후스를 불태웠습니다.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습니다.
종교개혁 1500–1650
- 1517년 비텐베르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수도사이자 성경 교수 마르틴 루터가 면벌부를 두고 토론을 청한 95개 논제는 인쇄기를 타고 독일 곳곳으로 퍼졌고, 1521년 보름스에서 그는 자기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는 독일어 성경의 빛과 함께 농민 전쟁과 유대인에 대한 글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 취리히, 제네바, 스코틀랜드 1523년 취리히에서 츠빙글리가 시의회와 함께 교회를 성경으로 다시 세우기 시작했고, 1525년 그의 젊은 동료들은 믿음을 고백한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다 같은 도시의 손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온 칼뱅은 피난민의 도시에서 교회의 질서를 세웠고, 1560년 스코틀랜드는 존 녹스와 함께 개혁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 가톨릭 개혁과 세계 선교 16세기 가톨릭 교회는 1540년 인가된 예수회와 1545년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로 안에서부터 새로워졌고, 그 선교사들은 일본과 중국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같은 시대 아메리카에서는 정복이 원주민을 짓밟았고, 그들 편에 서서 항의한 수도사들이 있었습니다.
- 종교 전쟁과 관용 종교개혁 뒤 한 세기 동안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서로 죽였습니다. 1572년 파리의 학살과 1618년부터 1648년까지의 30년 전쟁을 지나며, 낭트 칙령과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 같은 불완전한 평화와 함께 양심의 자유를 구하는 목소리가 자라났습니다.
근대 1650–1900
- 청교도와 경건주의 17세기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말씀대로 개혁된 교회와 삶을 구했고, 1662년에는 이천 명가량의 목사가 양심 때문에 설교단을 떠났습니다. 독일에서는 1675년 슈페너의 『경건한 소원』이 말씀 읽기와 작은 모임과 살아 있는 믿음을 일깨웠고, 헤른후트의 모라비아 형제단은 먼 나라로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 대각성과 감리교 운동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고 적은 존 웨슬리는 조지 휫필드와 함께 들판에서 설교하고 회심한 이들을 속회로 길렀습니다. 1740년 무렵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에드워즈의 노샘프턴과 휫필드의 순회 설교로 대각성이 일어났고,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 사람들 가운데서도 교회가 자랐습니다.
- 근대 선교의 세기 1792년 윌리엄 캐리의 소책자와 이듬해 그의 인도행으로 개신교 선교의 세기가 열렸습니다. 선교사들은 중국과 버마와 아프리카로 가서 그 땅의 말을 배우고 성경을 옮겼고, 가장 큰 열매는 그 땅 사람들이 스스로 이끄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은 제국의 배와 조약과 함께 가기도 했습니다.
- 노예제 폐지와 사회 개혁 그리스도인의 나라들은 수백 년 동안 아프리카 사람들을 사고팔았고, 많은 교회가 성경을 들어 그것을 옹호했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은 퀘이커와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노예였던 이들 자신이 이에 맞섰고, 영국은 1807년에 노예 무역을, 1833년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미국은 전쟁 끝에 1865년 수정 헌법 제13조로 노예제를 끝냈습니다.
- 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박해 18세기 말 조선의 젊은 학자들은 베이징에서 온 한문 책을 읽고 스스로 믿음에 이르렀고,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평신도들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1791년부터 1866년까지 여러 차례의 박해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냈고, 1984년 그 가운데 103위가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 개신교 선교와 한국 교회의 시작 선교사들이 자리 잡기 전에 1832년 귀츨라프가 서해안에 성경을 남기고 갔고, 1866년 토마스가 대동강에서 죽었으며, 만주에서는 한국인 번역자들이 존 로스와 함께 신약을 옮겼습니다. 1884년 의사 알렌이,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왔고, 1887년 서울에 새문안교회와 정동교회가 섰습니다.
현대 1900–
- 1907년 평양 대부흥과 일제 강점기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에서 사람들은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서로 화해했습니다. 나라를 잃은 뒤 그리스도인들은 1919년 3·1 운동에 함께했고,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압력 아래 신사참배를 결의했을 때 많은 이가 이를 거부하다 옥에 갇혔고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 두 차례 세계대전과 교회 1914년 유럽의 교회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전쟁을 축복했고, 1915년 오스만 제국에서는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의 길로 내몰렸습니다. 나치 독일에서 고백교회는 바르멘에서 그리스도만을 주로 고백했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유대인을 위해 거의 소리를 내지 못했고, 전쟁 뒤 교회들은 죄를 고백하며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로 모였습니다.
- 전쟁과 분단, 그리고 성장 1945년의 해방은 곧 분단으로 이어졌고, 북쪽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전쟁 속에서 손양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살았고, 그 뒤 한국 교회는 나뉘면서도 크게 자라 세계로 선교사를 보냈지만, 그 성장은 크기와 돈과 분열의 유혹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 오늘의 세계 교회 1910년 에든버러에 모인 선교 대표들은 대부분 유럽과 북미 사람이었지만, 한 세기 뒤 세계 교회의 무게중심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옮겨 갔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박해와 이주와 만남 속에서 모든 족속과 방언의 교회가 함께 경주를 달리는 오늘, 이 과정은 교회의 역사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의 회개의 이야기로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