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12과

EN

1054년, 동서 교회가 갈라지다

1054년 7월 교황의 사절들이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제단에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교서를 올려놓았고, 총대주교의 회의도 그들을 정죄했습니다. 이 일은 여러 세기에 걸친 멀어짐의 한 장면이었고, 1204년 십자군의 약탈이 상처를 깊게 했으며, 1965년 두 교회는 서로의 파문을 거두었습니다.

큰 둥근 지붕과 네 개의 첨탑을 갖춘 하기아 소피아가 넓은 광장 너머에 서 있고, 말 탄 사람들과 행인들이 지나가는 석판화.
루이 아그(가스파레 포사티 원화),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1852년 · 출처

연표에서 보기

멀어진 형제

천 년 가까이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같은 신경을 고백하고 같은 공의회를 받았지만, 서방은 라틴어를, 동방은 헬라어를 쓰며 서로의 말을 아는 이가 드물어졌습니다. 로마 감독은 베드로의 자리를 이은 교황으로서 온 교회를 다스릴 권위를 주장했고, 동방은 로마에 명예의 첫자리를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큰일은 공의회가 함께 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서방이 니케아 신경에 ‘그리고 아들에게서’, 곧 필리오케를 더해 부른 일과, 성찬에 서방은 누룩 없는 떡을, 동방은 누룩 넣은 떡을 쓰는 일도 다툼이 되었습니다. 이 물음들의 신학은 신학 과정의 수도원, 선교, 동서 교회의 분열 과에서 다루고, 이 과는 그 뒤에 일어난 일을 따라갑니다.

11세기 중엽 남이탈리아에는 헬라어로 예배하는 교회와 라틴어로 예배하는 교회가 섞여 있었고, 노르만족이 그 땅을 차지해 가고 있었습니다. 1053년 무렵 동방에서는 서방이 누룩 없는 떡으로 성찬을 드린다고 꾸짖는 편지가 나왔고, 서방의 기록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가 그 도시의 라틴 교회들을 닫게 했다고 전합니다. 교황 레오 9세는 노르만족에 맞서 비잔티움 황제와 손잡기를 바라면서 이 일에 답하려고, 1054년 봄 실바 칸디다의 추기경 훔베르트를 비롯한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레오 9세는 사절들이 그곳에 머물던 4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054년 7월, 하기아 소피아

거대한 돔 아래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하기아 소피아 안에 이층 회랑의 아치들과 오스만 시대에 건 둥근 글씨판이 보인다.
세바 앤드 주아이예 사진관, 〈하기아 소피아 내부〉, 1900–1910년 무렵 (미국 의회도서관) · 출처

사절들과 총대주교의 만남은 처음부터 어긋났습니다. 케룰라리오스는 사절들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고, 훔베르트는 날카로운 글로 동방의 관습을 공격했습니다. 1054년 7월 16일 토요일, 사절들은 예배를 앞둔 하기아 소피아에 들어가 총대주교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파문하는 교서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나왔습니다. 한 부제가 뒤쫓아 가 교서를 도로 가져가 달라고 빌었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며칠 뒤 총대주교의 회의는 그 교서와 그것을 쓴 이들을 정죄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자세히 아는 것은 그 교서와 총대주교 회의의 칙령이 함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파문 교서와 총대주교 회의의 칙령. 두 문서를 읽으면 이것이 두 교회 전체의 단절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서는 황제와 도시의 백성을 바른 신앙을 지닌 이들로 부르며 총대주교와 그 무리를 겨누었고, 그것을 보낸 교황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 뒤로도 곳에 따라 라틴인과 헬라인이 함께 성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는 1054년을 한순간의 단절이 아니라, 여러 세기에 걸쳐 자라 온 멀어짐이 드러난 해로 봅니다.

1204년, 그리고 두 교회의 기억

상처를 깊게 한 것은 150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1198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예루살렘을 되찾자며 부른 제4차 십자군은, 배를 빌린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갚지 못하자 1202년 같은 그리스도인의 도시인 아드리아 해의 자라를 쳤습니다. 이어 그들은 쫓겨난 비잔티움 황제의 아들이 돈과 교회의 연합을 약속하자 그를 세우려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습니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204년 4월 십자군은 도시를 함락하고 사흘 동안 약탈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교회들이 털렸고, 성물과 보물이 서방으로 실려 갔으며, 라틴인 황제와 라틴인 총대주교가 세워졌습니다.

불타는 도시를 빠져나온 비잔티움의 관리이자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역사』에서, 십자가를 어깨에 단 이 사람들보다 예루살렘을 차지했던 무슬림들이 오히려 더 너그러웠다고 썼습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그리스도인을 치지 말라고 명했고 약탈 소식을 듣고 그들을 꾸짖었지만, 그 뒤 세워진 라틴 제국과 라틴인 총대주교는 받아들였습니다. 라틴인의 지배는 1261년 비잔티움이 도시를 되찾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많은 역사가는 1054년의 파문보다 1204년의 약탈이 평범한 신자들의 마음까지 갈라놓았다고 봅니다.

동방의 오랜 교회인 정교회는 자기들이 일곱 공의회의 신앙을 바꾸지 않고 지켜 왔으며, 로마가 온 교회가 함께 고백한 신경을 홀로 고치고 모든 교회 위에 서는 권한을 주장하며 떨어져 나갔다고 이야기합니다. 가톨릭 교회(천주교)는 베드로의 자리인 로마 교회와의 사귐을 교회 일치의 중심으로 보고 동방 교회들이 그 사귐에서 멀어졌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정교회의 성례와 사도적 전통을 깊이 존중합니다. 서방에서 나온 개신교회는 대개 필리오케가 들어간 신경을 고백하면서도, 교황의 권한을 받아들이지 않는 점에서는 정교회와 같은 자리에 섭니다. 1274년 리옹과 1439년 피렌체의 공의회에서 연합이 선언되었지만, 동방의 신자들은 대부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화해, 그리고 오늘의 교회

저녁 빛 속 예루살렘의 돌계단 위에서 서방 교회 망토를 두른 주교와 검은 옷에 너울 쓴 모자를 쓴 동방 교회 주교가 서로 끌어안고, 계단 아래에서 두 교회의 성직자들이 지켜본다.
서로 끌어안는 동방과 서방의 두 주교

화해의 길은 20세기에 열렸습니다. 1964년 1월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예루살렘에서 만나 서로 껴안았고, 1965년 12월 7일 두 교회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같은 날 공동 선언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1054년에 서로 내린 파문을 아파하며 이제 그것을 지워 버린다고 밝혔습니다 가톨릭·정교회 공동 선언. 2000년 3월 ‘용서의 날’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갈라서게 한 죄를 고백했고 기억과 화해, 2001년 5월 아테네를 찾은 그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교회에 저지른 잘못을 두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며, 1204년 십자군이 그리스도인의 도시를 약탈한 일을 깊이 슬퍼한다고 말했습니다. 2004년 4월 약탈 800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이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1204년에 대한 사과와 그 수용.

예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믿을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 17:20-23).

이것은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1054년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교회의 바른 신앙과 관습을 지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말을 배우지 않았고, 다른 관습을 죄로 여겼으며, 끝내 성찬을 드리는 제단 위에서 서로를 정죄했습니다. 바울은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고 권했고 (고전 1:10),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지키라고 했습니다 (엡 4:2).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 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엡 4:4-5

매튜 헨리는 신자들이 "사소한 일들에 대하여 더 많이 논쟁할수록 기독교에 더 많은 의심을 던지게 됩니다"라고 경고하고 매튜 헨리, "견해의 일치가 없는 곳에서도 사랑의 연합만은 있게 하십시오"라고 권합니다 매튜 헨리. 파문은 거두어졌지만 두 교회는 아직 한 성찬상에 함께 서지 못합니다. 그래도 900년 만에 서로의 상처를 고백한 일은, 하나 됨이 자기 잘못을 먼저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교회가 나뉜 역사는 교회는 왜 이렇게 많이 나뉘었는가?에서 더 다룹니다. 다음 과 교황과 황제, 그리고 십자군에서는 같은 시대 서방에서 일어난 교황과 황제의 다툼과 십자군을 봅니다.

연습

  1. 연습 1 / 7

    1054년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7

    많은 역사가가 1054년을 한순간의 단절이 아니라 오랜 멀어짐이 드러난 해로 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7

    1204년에 일어난 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7

    다음 사건을 일어난 차례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7

    1965년 12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의 공동 선언이 밝힌 것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7

    정교회가 이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7

    요한복음 17:21에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그들을 통해 믿을 이들을 위해 구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읽으면 읽음이 됩니다. 눌러서 끄고 켤 수 있습니다.

출처

  1. 훔베르트·미카엘 케룰라리오스, 파문 교서와 총대주교 회의의 칙령 1054 — 1054년 7월. 실바 칸디다의 추기경 훔베르트가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의 제단에 올려놓은 교서는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파문했고, 며칠 뒤 총대주교의 회의는 칙령으로 그 교서와 그것을 쓴 사절들을 정죄했다. 교서는 황제와 도시의 시민들은 바른 믿음을 지녔다고 했으니, 두 문서 모두 두 교회 전체가 아니라 사람들을 겨누었다.
  2. 니케타스 코니아테스, 역사 13세기 초 / early 13th century — 13세기 초. 1204년 불타는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온 비잔티움의 관리가 니케아에서 마무리한 역사로, 십자군의 약탈과 교회들이 털린 일을 전하며 십자가를 어깨에 단 이 사람들보다 예루살렘을 차지했던 사라센 사람들이 오히려 더 너그러웠다고 쓴다.
  3. 교황 바오로 6세·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 가톨릭·정교회 공동 선언 1965 — 1965년 12월 7일.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서 함께 발표한 선언으로, 1054년에 서로 내린 파문을 유감으로 여기며 교회의 기억과 교회 가운데에서 지운다고 말한다.
  4. 국제신학위원회·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 그리고 용서의 날 2000 — 2000년. 3월에 발표된 국제신학위원회의 문서는 교회가 지난날 그 자녀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는 근거를 밝히고, 같은 해 3월 12일 ‘용서의 날’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리를 섬긴다며 쓴 폭력,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해친 죄, 유대인에게 지은 죄 등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 1204년에 대한 사과와 그 수용 2001, 2004 — 2001년 5월 4일, 아테네.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교회 형제자매들에게 지은 죄에 대해 주께 용서를 구하며, 성지로 가던 십자군이 같은 믿음의 형제들을 친 1204년의 일을 깊이 슬퍼했다. 2004년 4월 약탈 800년을 맞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이 사과를 받아들였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