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13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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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황제, 그리고 십자군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세상 권력에서 교회의 자유를 되찾으려 했고,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그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1095년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로 시작된 십자군의 무리는 1096년 라인 지방의 유대인을 죽였고, 1099년 예루살렘에서는 무슬림과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아들딸들이 저지른 이런 죄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성벽 문 앞에 하인리히 4세가 맨발에 거친 참회복을 입고 서 있고, 위쪽 창가에서 교황이 손을 들어 내려다보는 그림.
에두아르트 슈보이저, 〈카노사의 하인리히 4세〉, 1862년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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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황제: 카노사, 1077

11세기 서방에서는 왕과 영주들이 감독과 수도원장을 세우고 그들에게 반지와 지팡이를 주었으며, 교회의 자리를 돈으로 사고파는 일도 흔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에서 일어난 개혁을 이어받은 이들은 교회가 세상 권력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한가운데 선 사람이 1073년 교황이 된 힐데브란트, 곧 그레고리우스 7세입니다. 1075년 그의 서간집에 실린 『교황 훈령(딕타투스 파페)』의 스물일곱 명제는 교황이 황제를 물러나게 할 수 있고(12항), 로마 교회는 잘못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잘못하지 않는다고(22항) 말합니다.

독일 왕 하인리히 4세는 감독을 세우는 일을 두고 교황과 부딪쳤고, 1076년 1월 보름스에서 독일 감독들과 함께 그레고리우스를 교황 자리에서 끌어내린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해 2월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그의 신하들을 충성 서약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제후들이 한 해 안에 파문이 풀리지 않으면 새 왕을 세우겠다고 하자, 하인리히는 한겨울에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1077년 1월 교황이 머물던 토스카나의 마틸데의 성 카노사에서,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사흘 동안 맨발에 참회의 옷을 입고 성문 밖에 서 있었고, 교황은 그의 파문을 풀어 주었습니다.

1080년 다시 파문된 하인리히는 1084년 로마를 차지하고 다른 교황을 세워 그에게서 황제의 관을 받았고, 그레고리우스는 자기를 구하러 온 노르만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것을 본 뒤 1085년 살레르노에서 망명자로 죽었습니다. 감독을 세우는 문제는 1122년 보름스에서, 교회가 영적 직무를 주고 황제는 세속의 권리를 주는 타협으로 매듭지어졌습니다. 가톨릭 교회(천주교)는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교회의 자유를 위해 싸운 성인으로 기리고, 개신교회는 오래도록 그에게서 왕들 위에 서려 한 교황권의 교만을 보았으며, 동방의 오랜 교회인 정교회는 로마 교회가 잘못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신학 과정의 수도원, 선교, 동서 교회의 분열 과). 오늘 많은 역사가는 그에게서 성직 매매에 맞선 참된 개혁과 세상 권력까지 다스리려 한 지나친 주장을 함께 봅니다.

클레르몽에서 예루살렘까지

높은 설교단에 선 교황이 말하고, 그 앞에 붉은 옷의 추기경들과 백합 무늬 푸른 옷을 입은 왕과 귀족들이 앉아 듣는다.
장 푸케, 〈클레르몽에서 십자군을 설교하는 우르바누스 2세〉, 『프랑스 대연대기』, 1455–1460년 무렵 (프랑스 국립도서관) · 출처

1071년 셀주크 튀르크가 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이기고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자,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서방에 군사를 청했습니다. 클뤼니의 수도사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기사들에게 원정을 호소했습니다. 1101년에서 1127년 무렵 사이에 원정의 역사를 쓴 샤르트르의 푸셰에 따르면, 우르바누스는 동방의 형제들을 돕고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하며 그 길에서 죽는 이에게 죄의 사함을 약속했습니다. 다른 연대기 작가들은 그 연설을 다르게 전하므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교황의 말 그대로가 아니라 그것을 들은 이들의 기억입니다 샤르트르의 푸셰, 예루살렘 원정사 1.3.

수많은 사람이 옷에 천 십자가를 달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들에게 원정은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가는 순례요, 죄를 위한 참회요, 동방의 그리스도인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땅과 재물을 바란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기사가 땅을 팔거나 저당 잡혀 큰 비용을 치르고 떠났기에, 많은 역사가는 그들의 신앙이 진지했다고 봅니다. 그 진지한 신앙이 저지른 일이 이 이야기를 더 무겁게 합니다.

1096년 봄, 큰 군대가 떠나기 전 에미코 백작 등이 이끈 무리가 라인강 가의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의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했습니다. 그들은 세례냐 죽음이냐를 강요했고, 많은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으며, 억지 세례를 받지 않으려고 스스로와 가족의 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슈파이어의 감독은 유대인을 숨겨 지켰고 마인츠의 대주교도 그들을 자기 궁에 받아들였지만, 마인츠의 무리는 궁에 밀고 들어왔습니다. 교황은 이런 일을 명하지 않았고 교회법도 억지 세례를 금했지만, 먼 데 있는 그리스도의 원수와 싸우자는 설교는 가까운 이웃을 향한 칼이 되었습니다. 이 일을 전하는 12세기의 『1096년 박해의 히브리어 연대기』는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 순교자로 기렸고, 유대인들은 오늘도 회당의 애가로 그들을 기억합니다.

십자군은 1097년 니케아, 1098년 안디옥을 거쳐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함락했습니다. 그들은 도성의 무슬림들을, 성전 산의 모스크로 피한 이들까지 죽였고, 유대인들도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십자군 자신의 연대기들은 이 학살을 승리로 적었고, 무슬림의 역사가들은 거룩한 도성에서 흘린 피를 오래 기억했습니다. 죽은 이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고 역사가들의 추산도 갈리지만, 그것이 학살이었다는 데에는 의견이 갈리지 않습니다. 그 뒤 88년 동안 예루살렘은 라틴인의 왕국이었습니다.

그 뒤의 십자군과 세 기억

1144년 에데사가 무슬림에게 넘어가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제2차 십자군을 설교했는데, 그는 라인 지방에서 유대인을 죽이라고 설교하던 한 수도사를 직접 찾아가 막았습니다.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은 살라딘은 주민들이 몸값을 내고 떠나게 했고, 몸값을 내지 못한 많은 이가 노예가 되었지만 1099년 같은 학살은 없었습니다. 제3차 십자군은 도성을 되찾지 못했고, 제4차 십자군은 1204년 그리스도인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습니다(1054년, 동서 교회가 갈라지다 과). 1209년에는 남프랑스의 이단을 치는 십자군도 일어났습니다(종교재판과 이단 과). 1219년에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이집트의 십자군 진영을 지나 술탄 알카밀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고 초기 기록들은 전하며,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며 동방의 십자군 국가들은 끝났습니다.

무슬림들에게 십자군은 서쪽에서 온 프랑크인의 침략이었고, 그들은 살라딘을 도성을 되찾은 너그러운 군주로 기억합니다. 오늘도 많은 무슬림에게 ‘십자군’이라는 말은 서방의 침략과 지배를 떠올리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1096년은 그리스도교 유럽에서 이어진 오랜 박해의 시작으로 기억됩니다.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을 청했다가 때로는 보호자를, 때로는 주인을 맞았습니다. 십자군은 안디옥과 예루살렘에 라틴인 총대주교를 세웠고, 십자군이 떠난 뒤 이슬람의 땅에 남은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침입자의 동족으로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십자군을 거룩한 원정으로 기렸고, 십자군에게 약속된 죄의 사함은 뒷날 루터가 문제 삼은 면벌부의 한 뿌리가 되었습니다(1517년 비텐베르크 과). 2000년 3월 ‘용서의 날’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자녀들이 진리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휘두른 폭력과 유대인에게 지은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기억과 화해.

오늘의 교회에게

예루살렘 성전산 위, 푸른 타일로 덮인 바위의 돔 앞 돌마당에서 물동이를 인 여인과 사람들이 오가고, 오른쪽에 둥근 지붕의 샘 건물이 서 있다.
구스타프 바우에른파인트, 〈예루살렘 바위의 돔과 카이트베이 샘〉, 19세기 후반 · 출처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쳤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들은 다 칼로 망하리라.

마 26:52

빌라도 앞에서는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속했다면 종들이 싸웠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18:36). 바울은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라고 했고 (고후 10:3-4), 매튜 헨리는 이 말씀을 "복음의 방법은 외적인 힘이 아니라 진리의 능력과 지혜의 온유함으로 하는 강한 설득입니다"라고 풉니다 매튜 헨리.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라. 가능하다면 너희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라. …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7-21

십자군의 이야기는 진지한 신앙도 원수를 미워하는 데 하나님의 이름을 쓸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들을 멸시하기보다 같은 유혹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알고, 무슬림과 유대인과 동방 그리스도인이 이 일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칼로 넓어지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들을 통해 넓어집니다. 다음 과 탁발 수도회에서는 같은 시대에 칼이 아니라 가난과 설교로 복음대로 살려 한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를 봅니다.

연습

  1. 연습 1 / 8

    1077년 1월 카노사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8

    1075년 그레고리우스 7세의 서간집에 실린 『교황 훈령』의 명제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8

    샤르트르의 푸셰에 따르면 1095년 클레르몽에서 우르바누스 2세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8

    1096년 봄 라인 지방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8

    1099년 7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의 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8

    다음 사건을 일어난 차례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8

    첫 십자군의 동기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8. 연습 8 / 8

    2000년 3월 ‘용서의 날’에 요한 바오로 2세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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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 훈령(딕타투스 파페) 1075 — 1075년. 그레고리우스 7세의 서간집에 실린 27개 명제로,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수 있고(12항) 로마 교회는 오류를 범한 적이 없으며 영원히 범하지 않으리라고(22항) 말한다.
  2. 샤르트르의 푸셰, 예루살렘 원정사 1.3 — 1101–1127년경. 1095년 클레르몽에서 우르바누스 2세가 동방의 그리스도인을 돕고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호소하며 원정길에 죽는 이에게 죄의 사함을 약속했다고 전한다. 푸셰가 전한 연설이며, 다른 연대기 작가들은 다르게 전한다.
  3. 솔로몬 바르 삼손·엘리에제르 바르 나탄 등, 1096년 박해의 히브리어 연대기 12세기 / 12th century — 12세기 전반–중엽. 1096년 봄 십자군 무리가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의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하고 세례냐 죽음이냐를 강요한 일을 전하는 히브리어 기록들로, 슈파이어의 감독이 유대인을 지킨 일과 마인츠의 대주교 궁에 무리가 밀고 들어온 일을 적고, 억지 세례를 거부하고 죽은 이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 순교자로 기린다.
  4. 국제신학위원회·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 그리고 용서의 날 2000 — 2000년. 3월에 발표된 국제신학위원회의 문서는 교회가 지난날 그 자녀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는 근거를 밝히고, 같은 해 3월 12일 ‘용서의 날’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리를 섬긴다며 쓴 폭력,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해친 죄, 유대인에게 지은 죄 등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