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함께 읽기
성경은 혼자 읽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풀고,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의 규칙 안에서 읽으며, 본문의 평이한 뜻을 먼저 찾고, 여러 세기 교회의 읽기를 성경 아래의 길잡이로 삼습니다.
베드로가 바울을 읽다
신약에는 사도가 다른 사도의 글을 읽는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둘째 편지 끝에서 바울의 편지들을 두고 이렇게 씁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의 모든 서신에서도 이것들에 관해 그 안에서 말하였으되 그 안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므로 배우지 못하여 불안정한 자들이 다른 성경 기록들과 같이 그것들도 왜곡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라.
벧후 3:15-16
몇 가지가 보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다른 성경과 나란히 놓습니다. 그리고 사도인 그도 그 편지에 알기 어려운 곳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잘못 읽고 있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위험은 다른 데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굳게 서지 못한 사람이 어려운 곳을 제 뜻대로 비틀어 푸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다고 바울을 읽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장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 거룩한 대언자들이 전한 말씀들과 주 곧 구원자의 사도인 우리에게서 받은 명령을 명심하게 하려 함이라" (벧후 3:2). 그리고 자신의 굳건함에서 떨어지지 말고 은혜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라는 말로 맺습니다 (벧후 3:17-18). 성경을 바로 읽는 사람은 홀로 서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전한 가르침 안에서, 그 가르침을 함께 받은 교회와 함께 읽습니다.
성경으로, 신앙 안에서, 평이한 뜻부터
교회는 이 길을 몇 가지 원칙으로 말해 왔습니다. 첫째는 성경으로 성경을 푸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느 성경 구절의 참되고 온전한 뜻(그것은 여러 가지가 아니고 하나이다)에 관하여 의문이 있을 때에는, 더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구절들로 그것을 찾아 알아야 한다.
1장 9항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기뻐하였으리라 하시며 "이는 내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 14:28). 4세기에 아들을 지음 받은 존재로 가르친 아리우스파는 이 말씀을 즐겨 들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도 하셨고 (요 10:30), 바울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빌 2:6-7). 북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씀들을 함께 읽고 "그분은 사람이시므로 가셨고, 하나님이시므로 머무르셨습니다"라고 풉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 논쟁의 역사는 신학 과정의 ‘니케아’ 과가 다룹니다.
둘째는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 안에서 읽는 것입니다. 2세기 리옹의 감독 이레나이우스는 온 세상에 흩어진 교회가 사도들에게서 받은 한 신앙을 요약하고, 가르치는 이마다 재능은 달라도 그 내용을 바꿀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어떤 이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들의 뜻을 밝혀내어 그것들을 신앙의 전체 체계에 맞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 반박 1.10.3. 이렇게 사도들에게서 받아 교회가 함께 고백해 온 믿음의 요약을 신앙의 규칙이라고 하고, 사도신경 같은 신경이 그것을 짧게 담고 있습니다. 한 구절을 이렇게 신앙 전체에 비추어 읽는 것을 신앙의 유비라고도 합니다. 한 구절의 풀이가 신경이 고백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다른 하나님을 말한다면 그 풀이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셋째는 본문의 평이한 뜻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저자가 자기 말과 문법과 시대 속에서 실제로 말한 뜻, 곧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뜻을 성경의 참뜻으로 삼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공의회의 결정과 옛 저술가들의 의견도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 판단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1장 10항. 개혁교회는 교부와 신경을 귀히 읽되 성경 아래에 둡니다. 교회의 오랜 읽기는 길잡이이지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개혁주의 과정의 ‘오직 성경’ 과에서 배우고, 이 원칙들은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짧게 모여 있습니다.
교회들이 읽어 온 길
교부들과 중세 교회는 문자적 뜻 위에 영적인 뜻을 더 읽었습니다. 5세기 남부 갈리아 마르세유의 수도사 요한 카시아누스는 예루살렘을 예로 들어, 문자적 뜻(그는 역사적 뜻이라 불렀습니다)으로는 유대인의 도성이고 알레고리로는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도덕적 뜻으로는 사람의 영혼이고 아나고기, 곧 하늘을 바라보는 뜻으로는 하늘의 도성이라고 했습니다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14.8. 이 네 가지 뜻의 역사는 신학 과정의 ‘성경을 해석하는 길’ 과와 ‘교부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었나’ 과에서 다룹니다.
가톨릭 교회(천주교)는 성경과 거룩한 전승이 함께 하나님의 한 말씀을 이루어 교회에 맡겨졌고, 그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는 일은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인 교도권에 맡겨졌으며, 교도권은 말씀 위에 서지 않고 말씀 아래에 선다고 가르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 10항. 또 모든 뜻의 바탕인 문자적 뜻과 그 위에 서는 영적인 뜻, 곧 알레고리와 도덕적 뜻과 아나고기를 함께 말하고,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마지막에 교회가 판단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15–119항.
동방의 오랜 교회인 정교회의 신학자 게오르기 플로롭스키는 성경이 교회 안에서 주어지고 교회 안에서 읽힌다고 말합니다. 전통은 성경에 덧붙는 다른 원천이 아니라, 교부들과 함께 성경을 바르게 읽는 교회의 살아 있는 기억이라는 것입니다 플로롭스키, 성경, 교회, 전통. 정교회는 무엇보다 예배 가운데서 성경을 읽고 노래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성경을 혼자의 생각대로 풀지 않고,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 안에서 읽으며, 교부들의 읽기를 귀히 여긴다는 데 함께 섭니다. 다른 것은 교회의 읽기가 갖는 권위입니다.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는 교회의 살아 있는 전승 안에서 성경을 권위 있게 읽는다고 하고, 개혁교회는 그 전승을 귀히 받되 모두 성경으로 시험합니다.
해 보기
사도행전 15장을 지도에서 여십시오. 예수 탭의 지도에서 사도행전을 열고 15장을 누르면 ‘한 줄 요약’과 ‘관찰’ 칸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읽기’로 본문을 여십시오. 이방인 신자도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는 물음 앞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성경을 읽는 장면입니다.
6절부터 21절까지 읽으며 누가 무엇으로 말하는지 적으십시오. 사도와 장로들이 모이고, 베드로와 바나바와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하며, 야고보는 예언서의 말씀을 듭니다. ‘7-11절: 베드로가 겪은 일’, ‘15-17절: 야고보가 인용한 예언서’처럼 적으면 됩니다.
16절에서 성경으로 성경을 비추어 보십시오. 16절을 누르고 ‘원어·주석’의 관주 탭에서 야고보가 인용한 아모스서의 자리를 찾아 읽으십시오. 그다음 주석 탭에서 15절에 대한 웨슬리의 짧은 풀이를 읽고, 한 줄 요약에는 이 회의가 무엇을 어떻게 정했는지 한 문장으로 적으십시오.
연습
- 연습 1 / 6
베드로후서 3:15-16에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 연습 2 / 6
교회는 예수께서 아버지가 자기보다 크시다고 하신 요한복음 14:28을 어떻게 읽어 왔습니까?
- 연습 3 / 6
이레나이우스는 가르치는 이들의 재능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 연습 4 / 6
요한 카시아누스가 예로 든 예루살렘을 도덕적 뜻으로 읽으면 무엇입니까?
- 연습 5 / 6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 10항에서 교도권을 어떻게 가르칩니까?
- 연습 6 / 6
성경은 교회 안에서 주어지고 읽히며, 전통은 성경에 덧붙는 다른 원천이 아니라 교부들과 함께 성경을 바르게 읽는 교회의 살아 있는 기억이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끝까지 읽으면 읽음이 됩니다. 눌러서 끄고 켤 수 있습니다.
관련 주제
출처
-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 180년경. 영지주의에 맞서 창조주 하나님과 성육신을 변호하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새롭게 하신다(총괄갱신)고 가르친다. 5권은 의인들이 새로워진 창조 안에서 다스린다는 소망을 말한다. 읽기
-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14.8 — 420년대. 성경의 앎을 역사적 의미와 영적 의미로 나누고, 영적 의미를 알레고리·도덕·아나고기(하늘을 바라보는 뜻)의 셋으로 풀며 예루살렘을 예로 든다. 역사로는 유대인의 도성, 알레고리로는 그리스도의 교회, 도덕으로는 사람의 영혼, 아나고기로는 하늘의 도성이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하느님의 말씀) 1965 — 성경과 성전(聖傳)이 하나의 계시를 이루며 교도권이 이를 해석한다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10항). 성경을 읽을 때 저자의 의도와 문학 양식,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살피라고 한다(12항).
- 가톨릭교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115–119 — 1992년. 성경의 뜻을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로 나누고, 영적 의미를 알레고리적·도덕적·아나고기적 의미로 설명한다. 모든 의미는 문자적 의미에 바탕을 두며(116항), 성경 해석은 마지막에 교회의 판단 아래 있다고 한다(119항).
- 게오르기 플로롭스키, 성경, 교회, 전통 1972 — 1972년. 정교회의 시각에서 성경은 교회 안에서 주어지고 교회 안에서 읽히며, 전통은 성경에 덧붙는 다른 원천이 아니라 교부들과 함께 성경을 바르게 읽는 교회의 살아 있는 기억이라고 말한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푼다는 교회의 오랜 읽기 원칙을 기준으로 삼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그 뜻을 밝히고, 여러 전통의 읽는 방법도 공정하게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