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26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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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와 신정통주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이 무너졌을 때, 카를 바르트는 사람의 종교가 아니라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외쳤고, 그 신학은 히틀러 앞에서 고백교회의 바르멘 신학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많은 복음주의자는 말씀과 그리스도 중심을 되찾아 준 그를 고마워하면서도 그의 성경관과 선택론을 물었습니다.

포격으로 무너진 고딕 건물의 탑과 벽만 풀밭 위 잔해 사이에 남아 있는 수채화입니다.
에밀리 머리 패터슨, 〈이프르의 직물회관〉, 제1차 세계대전 중 · 출처

연표에서 보기

1914년, 무너진 확신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은 교양과 도덕이 자라면 세상이 조금씩 하나님 나라를 닮아 가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계몽주의와 근대 신학 과). 그러나 1914년 8월 유럽이 전쟁에 뛰어들자 그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기독교 국가라 자부하던 나라들이 서로 총을 겨누었고, 교회의 강단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전쟁을 축복했습니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에서 개혁교회 목사로 일하던 카를 바르트(1886–1968)에게 이것은 신학의 위기였습니다. 독일의 지식인들이 황제 빌헬름 2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선언을 내놓았는데, 서명한 이들 가운데 하르낙을 비롯해 그가 존경하던 스승들이 거의 다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르트는 훗날 이 일을 1914년 8월 초의 일로 기억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93인 선언이 나온 것은 그해 10월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스승들의 윤리가 이렇게 무너진다면 그들의 성경 해석과 교의학도 믿을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이웃 마을의 목사 친구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과 함께 설교할 말씀을 찾아 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붙든 물음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였습니다. 바르트는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시는 길이 펼쳐지는,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만났습니다. 그 열매가 1919년에 나온 『로마서 주석』입니다 바르트, 로마서 주석.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검은 바탕 위에 가장자리가 해지고 군데군데 구멍이 난 길쭉한 갈색 파피루스 조각이 놓여 있고, 헬라어 대문자가 희미하게 줄지어 적혀 있습니다.
〈파피루스 26〉, 로마서 1:10–16, 7세기 (서던 메서디스트 대학교 브리드웰 도서관) · 출처

바르트는 1922년 이 책을 거의 새로 썼고, 이 둘째 판이 유럽의 신학계를 뒤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짐작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전적 타자’이시며, 그분이 친히 말씀하실 때에만 알려지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종교 체험이나 도덕의 진보가 아니라, 사람의 모든 시도 위에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이자 그 심판 속에 감추어진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의 가장 높은 시도인 종교마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신학이 ‘위기의 신학’ 또는 ‘변증법적 신학’이라 불린 까닭입니다.

바르트가 씨름한 말씀은 4세기 전 루터를 붙들었던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루터: 십자가 신학과 칭의 과).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웨슬리는 이 두 절을 두고 "성 바울이 이 서신에서 복음의 요약을 담듯이, 이 절과 다음 절에서는 서신의 요약을 담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웨슬리. 바르트에게도 복음은 사람이 내세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

교수가 된 바르트는 이 외침을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 다듬었습니다. 1932년부터 평생 써 나갔으나 끝내 마치지 못한 『교회 교의학』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바르트, 교회 교의학. 첫째는 계시된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처럼 (요 1:14),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한 인격입니다. 둘째는 그분을 증언하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고, 셋째는 성경을 따라 오늘 선포되는 교회의 설교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라고 말하는데 (히 1:2), 바르트의 신학 전체는 이 아들에게서 출발합니다. 그의 계시 이해는 특별 계시 항목과 교리 과정의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심 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신정통주의’는 주로 영어권에서 이 흐름에 붙인 이름으로, 종교개혁자들과 옛 신조의 주제로 돌아가되 근대 성경 비평은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 흐름에는 에밀 브루너와 루돌프 불트만도 함께했지만 곧 길이 갈라졌습니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1892–1971)는 사람의 죄를 개인을 넘어 집단과 국가의 교만에서까지 진지하게 본 ‘그리스도인 현실주의’로, 흔히 이 흐름의 미국 쪽 얼굴로 꼽힙니다.

마르부르크의 신약학자 불트만(1884–1976)은 1941년 『신약성서와 신화』에서 비신화화를 제안했습니다 불트만, 신약성서와 신화. 그가 보기에 신약은 하늘과 땅과 지하로 나뉘고 초자연적인 힘이 끼어드는 고대의 세계상 안에서 말합니다. 그 세계상까지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면 복음이 아닌 것이 걸림돌이 되므로, 그는 신화를 지우지 말고 그것이 사람의 실존에 대해 말하려는 바를 해석하자고 했습니다. 그 핵심은 손에 쥔 것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을 전하는 말씀 앞에서 믿음으로 결단하라는 부름입니다. 불트만에게 이것은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참된 걸림돌만 남기려는 설교자의 수고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부활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 십자가를 구원의 사건으로 믿는 부활절 신앙이었고, 바르트를 포함한 많은 이가 여기서 그와 갈라섰습니다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

바르멘과 고백교회

1933년 1월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독일 개신교회 안에서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와 나치의 민족주의를 하나로 묶어 히틀러의 등장과 독일 민족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어 냈고, 유대인 혈통의 목사들을 교회에서 몰아내려 했습니다. 그해 7월 교회 선거에서 그들이 크게 이기자 교회는 국가의 한 기관이 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본 대학에서 가르치던 바르트는 이에 맞서는 이들의 신학적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1934년 5월 말 부퍼탈의 바르멘에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와 연합교회의 대표들이 첫 고백 총회로 모였습니다. 그들이 채택한 바르멘 신학 선언은 여섯 조항으로 되어 있고, 초안은 대부분 바르트가 썼습니다 바르멘 신학 선언. 첫 조항은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듣고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교회가 이 말씀 말고 다른 사건이나 권세나 인물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거짓이라고 물리칩니다. 이 조항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 14:6). 또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다른 길로 넘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라고 하신 뒤 (요 10:1),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라고 하셨습니다 (요 10:9).

바르멘이 새 교리를 지어낸 것은 아닙니다. 매튜 헨리도 이 말씀을 풀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믿어야 합니다"라고 썼습니다 매튜 헨리. 바르멘은 이 오래된 고백을, 국가와 민족이 또 하나의 계시를 자처하던 때에 다시 말한 것입니다. 다섯째 조항은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일이 하나님께서 국가에 맡기신 임무임을 인정하면서도, 국가가 사람의 삶 전체를 다스리려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 고백에 선 이들이 고백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같은 해 바르트는 스위스의 동료 에밀 브루너(1889–1966)와도 갈라섰습니다. 브루너는 죄인에게도 말씀을 알아듣고 책임을 질 능력이 남아 있어 복음이 닿을 ‘접촉점’이 된다고 보고, 그리스도인의 자연 신학에 자리를 주었습니다. 바르트는 『아니오!』라는 글로 답했습니다. 민족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주장이 교회를 삼키려던 때에,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들을 귀까지 친히 지으신다고 맞섰습니다 (일반 계시). 바르트는 그해 말 히틀러에게 조건 없이 충성하겠다는 맹세를 거부해 직무를 정지당했고, 이듬해 교수직을 잃고 고향 바젤로 돌아갔습니다.

고백교회의 이야기에는 그늘도 있습니다. 교회는 주로 자기 자유를 지키는 데 힘썼고, 박해받는 유대인을 위해서는 거의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바르트 자신도 1967년의 한 편지에, 교회 투쟁에서 유대인 문제를 중심 문제로 내세우지 못한 것을 오래 허물로 여겨 왔다고 썼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는 처음부터 고백교회에 섰던 젊은 루터교 신학자입니다. 그는 1935년부터 핑켄발데에서 고백교회의 신학원을 이끌었고, 이 신학원은 1937년 게슈타포에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해 나온 『나를 따르라』에서 그는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구별했습니다 본회퍼, 나를 따르라.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 제자도와 십자가가 빠진 은혜, 곧 죄인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하는 은혜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예수를 따르라고 부르기에 사람의 목숨을 요구하고 하나님께 아들의 목숨이 들었기에 값비싸지만, 참 생명을 주기에 은혜입니다. 예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막 8:34).

1939년 니버의 주선으로 미국에 갔던 본회퍼는, 이 어려운 때를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지나야 한다며 몇 주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매형 한스 폰 도나니를 통해 히틀러에 맞선 저항 세력과 이어졌고, 1943년 4월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암살 계획에 어디까지 관여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습니다. 1944년 7월 암살 시도가 실패한 뒤 그를 저항 세력과 잇는 문서가 드러났고, 그는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전해지기로 그는 끌려가며, 이것이 끝이지만 자기에게는 생명의 시작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받은 것과 물은 것

같은 장정으로 묶은 두꺼운 책들이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서재에, 책 더미와 잉크병과 펜이 놓인 책상 위로 등불이 켜져 있습니다.
같은 장정의 두꺼운 책들이 길게 늘어선 서재와 등불 켜진 책상

바르트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평가는 갈렸습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코넬리우스 반 틸은 1946년 『새로운 현대주의』에서 바르트와 브루너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반 틸, 새로운 현대주의. 그들이 정통의 말을 쓰지만 그 밑에는 칸트 이후의 근대 철학이 깔려 있어서, 결국 옛 자유주의와 뿌리가 같은 새로운 현대주의라는 것입니다. 같은 낱말 뒤에 다른 뜻이 숨어 있다는 이 경고를 귀하게 여긴 이도 많지만, 그가 바르트를 철학의 틀에 너무 맞추어 읽어 바르트가 하려던 말을 다 듣지 못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의 G. C. 베르카우어는 1954년 『바르트 신학에서 은혜의 승리』에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베르카우어, 바르트 신학에서 은혜의 승리. 그는 바르트의 신학을 은혜가 이긴다는 기쁜 소식으로 공감하며 읽으면서도 물었습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자 선택받은 사람이시며,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버림을 친히 지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불신앙의 결단이 여전히 진지하게 남는가, 이 선택론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결론으로 기울지 않는가? 바르트는 만인 구원을 교리로 가르치지도 배제하지도 않고, 다만 소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베르카우어에게 답하며, 자기가 말하려는 것은 은혜라는 원리가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바르트에게서 얻은 것은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다는 확신, 모든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해야 한다는 고집, 국가가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바르멘의 고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는 성경이 계시에 대한 사람의 증언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바르트의 설명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이라고 말하듯 (딤후 3:16),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자체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합니다 (영감).

오늘날에도 바르트는 가장 많이 연구되는 신학자 가운데 하나이고, 복음주의 안에는 그를 동반자로 읽는 이들과 반 틸처럼 경계하는 이들이 함께 있습니다. 이 시대가 남긴 물음은 지금도 교회 앞에 있습니다. 시대의 소리가 아무리 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이 부르실 때 값을 치르고 따르는가?

연습

  1. 연습 1 / 8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에서 돌아서게 된 계기로 이 과가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8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외친 내용으로 맞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8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에서 말한 하나님의 말씀의 세 가지 모양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8

    바르멘 신학 선언(1934)의 첫 조항이 고백한 것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8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에서 말한 ‘값싼 은혜’는 무엇입니까?

  6. 연습 6 / 8

    불트만이 제안한 비신화화의 뜻으로 맞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8

    반 틸과 베르카우어의 바르트 평가로 맞는 것은 무엇입니까?

  8. 연습 8 / 8

    복음주의자들이 바르트의 성경관에 대해 물은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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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카를 바르트, 로마서 주석 1919, 1922 —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며 그분의 말씀으로만 알려지신다고 외쳐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한 주석.
  2. 카를 바르트, 교회 교의학 1932–1967 —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대표작.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말씀으로 알려지신다고 보고 자연 신학을 거부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로 이해했다.
  3. 루돌프 불트만, 신약성서와 신화 1941 — 신약의 신화적 세계상을 벗겨 내고 그 실존적 부름을 해석하자는 비신화화 제안.
  4. 독일 고백교회, 바르멘 신학 선언 1934 —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듣고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고 고백하며 국가의 교회 장악을 거부한 선언.
  5.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제자도) 1937 —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구별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을 말한 책.
  6. 코넬리우스 반 틸, 새로운 현대주의 1946 — 바르트와 브루너의 신학을 개혁파 관점에서 날카롭게 비판한 책.
  7. G. C. 베르카우어, 바르트 신학에서 은혜의 승리 1954 — 바르트를 공감하며 읽되 선택론과 보편 구원의 문제를 물은 연구.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