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논증과 존재론적 논증
도덕 논증은 객관적인 선과 의무가 있다면 하나님이 그 가장 나은 근거라고 논하고, 존재론적 논증은 하나님이라는 생각 자체에서 그분이 계심을 이끌어 내려 합니다. 두 논증 모두 진지한 반론을 만났고, 그것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마음속에 기록된 법
바울은 기록된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도 옳고 그름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
롬 2:15
존 웨슬리는 마음속에 기록된 그 법이 "돌판에 계명을 새기신 바로 그 손이 새기신 것"이라고 풉니다 웨슬리. 도덕 논증은 이런 양심의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아이를 재미로 괴롭히는 일은 온 세상이 괜찮다고 해도 그르다고 우리는 압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합의와 상관없이 참인 선과 의무를 객관적이라고 합니다. 논증은 이렇습니다. (1) 객관적인 도덕 가치와 의무가 있다. (2)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근거는 선하시고 인격이신 하나님이다. (3) 그러므로 도덕은 하나님이 계심을 가리킨다. 이 논증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선을 모르거나 행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듯 그들도 "본성을 통해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행합니다 (롬 2:14). 물음은 우리가 선을 어떻게 아느냐가 아니라, 선이 무엇에 뿌리를 두느냐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 1권에서 이 물음을 일상의 말다툼에서 꺼냅니다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다투는 사람들은 상대도 알고 있으리라 여기는 기준에 호소하고, 그 기준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다 지키지 못합니다. 그는 이 법이 무리 짓는 본능일 뿐이라면 본능들 가운데 어느 것을 따를지 정해 주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고, 사회의 관습일 뿐이라면 한 사회의 도덕이 다른 사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법을 우주 뒤에 바른 행실을 바라는, 정신에 가까운 무엇이 있다는 실마리로 봅니다.
이마누엘 칸트는 다른 길로 갔습니다 이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그는 이론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도덕 법칙은 최고선, 곧 덕과 그에 걸맞은 행복이 하나 되는 것을 추구하라고 명합니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이룰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일치는 자연과 우리 힘으로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그것을 이루실 하나님을 실천 이성이 ‘요청’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론의 증명이 아니라 도덕적 삶이 서기 위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반론
첫째 반론은 플라톤의 『에우티프론』에서 나온 오랜 물음입니다. 경건한 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의 사랑을 받는지, 신들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지를 묻는 대화입니다 플라톤, 에우티프론 10a. 오늘날에는 이렇게 묻습니다. 선은 하나님이 명하시기 때문에 선한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하시는가? 앞의 것이라면 선은 하나님의 임의가 되어 잔혹함도 명하시면 선이 될 것이고, 뒤의 것이라면 선은 하나님 밖의 기준이 되어 도덕에 하나님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 고전적인 대답은 셋째 길입니다. 선은 하나님 밖의 기준도 임의의 결정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 자체이며, 그분의 명령은 그 본성에서 나옵니다. 예수께서도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막 10:18). 비판자들은 이것이 물음을 한 걸음 옮겼을 뿐이라고 말하고, 대답하는 이들은 어떤 설명이든 어딘가에서 멈추며 그 자리가 선 자체이신 인격이라는 것이 논증의 요점이라고 답합니다. 이 물음은 선과 악은 누가 정하는가?에서 더 다룹니다.
둘째 반론은 도덕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기에 우리가 공정함을 좋아하고 배신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많은 과학자가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도덕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생존에 쓸모 있던 느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답하는 이들은 먼저, 도덕 감각이 어떻게 생겼는지와 그 내용이 참인지는 다른 물음이라고 말합니다. 셈하는 능력이 생존에 도움이 되어 생겼더라도 2 더하기 2는 4입니다. 또 진화가 우리의 도덕 믿음을 그 참과 상관없이 다 설명한다면, 하나님 없이 도덕이 객관적이라고 보는 이의 확신도 함께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도덕이 객관적이라고 보는 철학자도 많고, 그들은 도덕적 사실을 더 설명할 필요 없는 마지막 사실로 봅니다. 그러니 이 논증은 어느 설명이 더 나은가를 묻는 논증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
존재론적 논증은 세계나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안셀무스가 『프로슬로기온』에서 기도하며 이 논증을 편 이야기는 중세와 종교개혁 과에서 보고, 여기서는 논증 자체를 살핍니다. (1) 하나님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이다. (2) "하나님은 없다" 하는 어리석은 자도 (시 14:1) 이 말을 이해하니, 그분은 적어도 생각 속에는 계신다. (3) 생각 속에만 있는 것보다 실제로도 있는 것이 더 크다. (4) 그러므로 그분이 생각 속에만 계시다면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모순이다. (5) 그러므로 그분은 실제로 계신다. 안셀무스의 말로는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이해 속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프로슬로기온 2장. 3장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조차 없을 만큼 참으로 존재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3장.
같은 시대의 수도사 가우닐로는 어리석은 자를 대신해 답했습니다. 이 논리라면 더없이 훌륭한 섬도 생각하기만 하면 실제로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안셀무스는 이 논증이 섬이 아니라 오직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께만 맞는다고 답했고, 훗날의 옹호자들은 섬의 훌륭함에는 끝이 없어 ‘가장 큰 섬’이라는 생각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 논증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두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한다 해도 "오직 그것이 정신 속에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올 뿐이다"라고 보았고 신학대전 제1부 2문 1항, 그래서 결과에서 원인으로 가는 다섯 길을 택했습니다 (앞 과). 칸트는 주로 데카르트가 되살린 형태를 겨냥해, ‘존재한다’는 말은 어떤 것의 개념에 새 성질을 더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제의 백 탈러(당시의 은화)가 생각 속의 백 탈러보다 한 푼도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옹호자들은 안셀무스의 3장이 말하는 것은 여느 성질이 아니라 없을 수 없는 존재, 곧 필연적 존재라고 답합니다. 20세기에 앨빈 플랜팅가는 이 생각을 가능성과 필연성의 논리로 다시 세웠고, 철학자들은 지금도 이 논증을 두고 다툽니다.
무엇을 보여 주는가
도덕 논증이 성공한다면 선의 근거이며 우리에게 의무를 지우는 거룩하고 인격적인 분을, 존재론적 논증이 성공한다면 없을 수 없는 가장 크신 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것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나 십자가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도덕 논증은 오히려 무거운 소식을 남깁니다. 우리는 그 법을 알면서도 어겼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루이스는 바로 이 자리에서 복음이 좋은 소식으로 들리기 시작한다고 보았습니다. 기도 속에서 나온 존재론적 논증은, 회의하는 이를 설득하는 도구이기보다 하나님이 세계 안의 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크신 분이심을 묵상하게 하는 글로 읽혀 오기도 했습니다.
변증의 길들도 도덕을 저마다 씁니다. 고전 변증은 이것을 하나님이 계심을 보이는 논증의 하나로, 전제 변증은 도덕이 성경의 하나님을 전제할 때에만 설명된다는 논증으로, 누적 논증은 여러 실마리 가운데 하나로 씁니다. 증거 변증은 이런 논증보다 부활 같은 역사의 증거를 앞세우고, 개혁파 인식론은 죄책감이나 감사 같은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논증 없이도 바르게 생겨날 수 있다고 봅니다.
대화에서는 도덕 논증을 상대를 정죄하는 데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도 정직하고 친절할 수 있고, 성경도 그렇게 말합니다. 물을 것은 그가 선한가가 아니라, 그가 옳다고 믿는 정의와 사랑이 무엇에 뿌리를 두는가입니다. 친구가 불의에 분노한다면 그 분노를 진지하게 여기고, 그 기준이 어디서 오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고 청하십시오. 하나님이 계신지에 대한 물음은 하나님은 존재하는가?에서 다룹니다. 다음 과 논증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에서는 이런 논증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봅니다.
연습
- 연습 1 / 8
도덕 논증이 말하는 ‘객관적인’ 도덕 가치란 무엇입니까?
- 연습 2 / 8
도덕 논증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 연습 3 / 8
칸트가 하나님을 실천 이성의 ‘요청’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 연습 4 / 8
에우티프론의 물음에 대해 이 과가 소개한 고전적인 대답은 무엇입니까?
- 연습 5 / 8
도덕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반론에 이 과가 소개한 첫 대답은 무엇입니까?
- 연습 6 / 8
가우닐로가 ‘더없이 훌륭한 섬’을 들어 반론했을 때 안셀무스는 어떻게 답했습니까?
- 연습 7 / 8
존재론적 논증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무엇입니까?
- 연습 8 / 8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가 불의에 크게 분노합니다. 이 과가 권하는 대화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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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주제
출처
-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1.1–1.5 — 1권. 사람마다 아는 옳고 그름의 법이 우주의 뜻을 푸는 실마리라고 논한다(도덕 논증).
- 이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 1788년. 이론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으나, 최고선을 향한 도덕의 요구가 하나님의 존재를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 세운다고 말한다.
- 플라톤, 에우티프론 10a — 선은 신이 명해서 선한가, 선해서 신이 명하는가?
-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1077–1078 —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으로 쓴 기도이자 논증. 하나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논한다. 읽기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 1265–1274년. 중세 신학을 집대성한 저작. 하나님과 창조와 섭리, 인간과 은혜, 그리스도와 성례를 두루 다루며, 하나님은 이성으로도 알려지시나 구원의 진리는 계시로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세계에 시작이 있었다는 것은 이성으로 증명되지 않고 믿음으로 붙든다고 한다(제1부 46문 2항). 읽기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변증의 여러 방법과 논증, 반론을 그 주장하는 이들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하며, 어느 한 방법만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