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 수도회
13세기 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카스티야의 도미니코는 수도원 담장 안이 아니라 길 위에서 가난하게 살며 복음을 전하는 형제들을 모았고, 교황은 1209년과 1216년에 그들의 삶을 인가했습니다. 이 탁발 수도회들은 도시와 대학에 복음을 전했지만, 뒷날 그 형제들 가운데서 종교재판관도 나왔습니다.
아시시의 상인의 아들
이 과정의 사막과 수도원 과에서 본 수도사들은 대개 한 수도원에 머물며 기도하고 일했습니다. 13세기에 생긴 새 수도회들은 달랐습니다. 형제들은 땅도 재산도 갖지 않고 손으로 일하거나 얻어먹으면서 이 도시 저 도시로 다니며 설교했습니다. 그릇을 들고 밥을 빈다는 뜻에서 이들을 탁발 수도회라고 부릅니다.
프란치스코는 1181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옷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사가 되기를 꿈꾸던 그는 1202년 이웃 도시 페루자와의 싸움에서 붙잡혀 한 해 가까이 갇혔고, 돌아와서는 오래 앓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1226년의 『유언』에서 그는 주께서 친히 자기를 나병 환자들 가운데로 이끄셨다고 회고합니다. 첼라노의 토마스가 쓴 『성 프란치스코의 첫째 생애』 등 첫 전기들에 따르면 1206년 무렵 아버지가 그를 주교 앞에 세워 재산을 돌려받으려 하자, 그는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 돌려주었습니다.
같은 전기들은 1208년 무렵 그가 미사에서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는 복음을 듣고, 이것이 바로 자기가 바라던 삶이라며 신과 지팡이를 버렸다고 전합니다.
너희는 가면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돈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놋을 준비하지 말고 여행을 위해 짐 보따리나 덧옷 두 벌이나 신이나 지팡이들을 준비하지 말라.
마 10:7-10
작은 형제들과 가난한 자매들
곧 아시시의 젊은이들이 그를 따라와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신 말씀대로였습니다 (마 19:21). 히에로니무스는 이 구절에서 "돈을 멸시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함에 충분하지 않고 구주를 좇아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히에로니무스.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은 목적이 아니라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1209년 그는 열한 형제와 함께 로마에 가서 복음서의 말씀으로 엮은 짧은 생활 규칙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내놓았습니다. 첫 전기들은 교황이 이를 말로 인가했다고 전하지만, 그 규칙의 본문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스스로를 ‘작은 형제들’이라 불렀고, 수도회가 빠르게 커지자 프란치스코는 규칙을 다시 썼습니다. 1223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교서로 확인한 이 회칙을 프란치스코회는 오늘도 지킵니다.
1212년 아시시의 귀족 집안 딸 클라라는 밤에 집을 떠나 프란치스코에게 와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는 성 다미아노 성당 곁에서 자매들과 함께 기도와 가난 속에 살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권리를 교황에게 거듭 청했습니다. 그가 쓴 회칙은 1253년 그가 죽기 이틀 전에 교황의 인가를 받았는데, 여성이 쓴 회칙으로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자매들을 클라라회라고 부릅니다.
1219년 이집트의 다미에타에서 십자군이 싸우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는 무기 없이 적진을 건너가 술탄 알카밀 앞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십자군 쪽 주교는 술탄이 그의 말을 듣고 그를 해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썼습니다. 1225년 병들고 눈이 멀어 가던 그는 형제 해와 자매 달과 모든 피조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태양의 노래』를 지었고, 죽음이 가까워 자매 죽음의 구절을 더했습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언』은 주께서 그에게 거룩한 복음의 방식대로 살아야 함을 보여 주셨다고 하며, 형제들에게 손으로 일하고 가난하게 살라고 당부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사랑받는 ‘평화의 기도’, 곧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달라고 비는 기도는 그의 글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1912년 프랑스의 한 가톨릭 잡지에 지은이 없이 처음 실렸고, 뒤에 그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설교자 도미니코
도미니코(1170년 무렵–1221)는 스페인 카스티야의 오스마 대성당에 속한 사제였습니다. 1206년 무렵 그는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와 함께 남프랑스를 지나다 카타리파가 널리 퍼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영혼은 선한 하나님에게서, 물질은 악한 권세에게서 왔다고 가르쳤고, 그들 가운데 ‘완전한 자’들의 엄격하고 검소한 삶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황이 보낸 사절들은 화려한 행렬을 거느리고 설교했습니다. 그의 후계자 작센의 요르단이 쓴 첫 전기 『설교자 수도회의 기원에 관한 소책자』에 따르면, 디에고와 도미니코는 사도들처럼 걸어 다니며 가난하게 설교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권했습니다.
1209년부터 이 땅에는 칼을 든 십자군이 들어왔지만(다음 과 종교재판과 이단), 도미니코는 말과 가난으로 설교하기를 이어 갔습니다. 1215년 툴루즈에서 동료들과 함께 지내던 그는 이듬해인 121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게서 설교자 수도회, 곧 도미니코회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옛 규칙을 따랐고, 1217년부터 도미니코는 형제들을 대학이 있는 파리와 볼로냐로 보냈습니다. 설교하려면 공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3세기 중엽에는 두 수도회가 모두 파리와 옥스퍼드에서 가르쳤습니다.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가 같은 무렵 파리에서 가르쳤고, 두 사람 모두 127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토마스의 신학은 신학 과정의 토마스 아퀴나스 과에서 다룹니다.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회를 이끌며 공식 전기를 썼고, 1266년 수도회는 그전의 전기들을 없애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남아 있는 여러 기록을 조심스럽게 견주어 프란치스코의 삶을 읽습니다.
빛과 그림자, 그리고 오늘
그림자도 있습니다. 1233년부터 교황들은 이단을 찾아내 재판하는 일을 주로 도미니코회에, 또 프란치스코회에 맡겼습니다. 설득하려고 가난을 택했던 설교자들의 후예가 사람들을 불에 넘기는 재판관이 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회 안에서도 가난을 어디까지 지킬지를 두고 다툼이 깊어져, 1318년 마르세유에서는 엄격한 가난을 고집한 형제 네 사람이 화형을 당했습니다.
가톨릭 교회(천주교)는 1228년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선포했고, 작은 형제회와 클라라회와 평신도 회원들이 오늘도 그의 길을 따릅니다. 2013년에는 그의 이름을 택한 첫 교황이 나왔습니다. 잉글랜드 교회에서 자란 성공회에도 프란치스코회 형제와 자매들이 있고,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몇몇 루터교회의 교회력은 10월 4일에 그를 기억합니다. 한국 교회가 부르는 찬송 ‘온 천하 만물 우러러’도 20세기 초 『태양의 노래』를 영어로 풀어 쓴 가사에서 왔습니다.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가 따르려 한 분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그리스도였습니다 (눅 4: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께서 부요하셨으나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자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매튜 헨리는 이 구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복되신 주님, 얼마나 큰 부요에서 얼마나 큰 가난으로 우리를 위하여 내려오셨습니까!" 매튜 헨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도 서원을 하지는 않지만, 교회는 나병 환자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고 말보다 삶으로 설교할 때 새로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도 힘을 얻으면 남을 누르는 칼이 될 수 있음을 탁발 수도회의 역사는 보여 줍니다. 다음 과 종교재판과 이단에서는 그 어두운 이야기를 봅니다.
연습
- 연습 1 / 8
프란치스코의 첫 전기들에 따르면, 1208년 무렵 그가 미사에서 듣고 자기 삶의 길로 삼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8
프란치스코가 1226년의 『유언』에서 회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3 / 8
클라라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4 / 8
남프랑스에서 디에고와 도미니코가 사도들처럼 가난하게 설교해야 한다고 본 까닭은 무엇입니까?
- 연습 5 / 8
다음 사건을 일어난 차례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6 / 8
흔히 ‘평화의 기도’라 불리는 기도에 대해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7 / 8
탁발 수도회 역사의 그림자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8 / 8
프란치스코를 기억하는 모습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읽으면 읽음이 됩니다. 눌러서 끄고 켤 수 있습니다.
관련 주제
출처
-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유언 1226 — 1226년. 죽음을 앞둔 프란치스코가 주께서 자신을 나병 환자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거룩한 복음의 방식대로 살아야 함을 보여 주셨다고 회고하며, 형제들에게 손으로 일하고 가난하게 살라고 당부한다.
- 첼라노의 토마스, 성 프란치스코의 첫째 생애 1228–1229 — 1228–1229년. 프란치스코가 시성된 해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명으로 형제 토마스가 쓴 첫 전기로, 그가 주교 앞에서 아버지에게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 돌려준 일, 미사에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는 복음을 듣고 신과 지팡이를 버린 일, 1209년 인노켄티우스 3세가 첫 규칙을 인가한 일을 전한다.
- 작센의 요르단, 설교자 수도회의 기원에 관한 소책자 — 1233년 무렵. 도미니코의 뒤를 이어 설교자 수도회를 이끈 요르단이 쓴 수도회의 첫 역사이자 도미니코의 첫 전기로, 1206년 무렵 몽펠리에에서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와 도미니코가 화려한 행렬을 거느린 교황 사절들에게 사도들처럼 걸어 다니며 가난하게 설교하라고 권한 일을 전한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