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박해
18세기 말 조선의 젊은 학자들은 베이징에서 온 한문 책을 읽고 스스로 믿음에 이르렀고,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평신도들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1791년부터 1866년까지 여러 차례의 박해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냈고, 1984년 그 가운데 103위가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책으로 찾아온 신앙
17세기부터 베이징에 다녀온 조선의 사신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쓴 책들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 가운데에는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1603년에 펴낸 『천주실의』가 있었습니다. 천주, 곧 하늘의 주님이 계심을 논하는 이 책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가톨릭 개혁과 세계 선교 과에서 보았습니다. 학자들은 처음에 이 책들을 서양의 학문, 곧 서학으로 읽었습니다. 천주교회는 1779년 겨울 천진암과 주어사에 젊은 학자들이 모여 이 책들을 공부했다고 전해 왔는데, 그 모임이 무엇을 공부한 자리였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립니다.
그 학자들 가운데 이벽은 책을 읽고 천주를 믿게 되었고, 1783년 겨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가는 이승훈(1756–1801)에게 세례를 받고 오라고 권했습니다. 1784년 초 이승훈은 베이징 북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뜻으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돌아온 그는 그해 서울에서 이벽과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한국 천주교회는 이해를 교회가 시작된 해로 기억합니다. 선교사가 오기 전에 평신도들이 책을 읽고 스스로 세운 교회였습니다.
1785년 명례방(오늘의 명동)에 있던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자들이 모이다가 발각되었고, 김범우는 귀양 가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제가 없던 신자들은 자기들 가운데서 신부를 세워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베풀었는데, 그것이 교회의 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두고 베이징의 주교에게 사제를 보내 달라고 청했습니다. 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보낸 답에는 조상 제사를 금한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었습니다.
신해박해와 신유박해, 그리고 백서
유학자들에게 제사는 돌아가신 부모를 살아 계실 때처럼 섬기는 효의 연장이고,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않는 사람의 도리였습니다. 신주는 그 조상을 모시는 자리였습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바오로)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유교식 제사를 지내지 않고, 외사촌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집안의 신주를 불살랐습니다. 조정은 이를 부모를 버리고 임금을 버리는 일로 보았고, 두 사람은 그해 12월 전주에서 목 베였습니다. 이것이 신해박해이며, 제사를 둘러싼 교회의 판단이 뒤에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그리스도인은 제사를 지내도 되는가?에서 다룹니다.
1795년 초 중국인 사제 주문모(야고보)가 몰래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어린 순조를 대신해 다스리던 대왕대비가 천주교를 금하는 명을 내렸고, 신유박해가 일어났습니다.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써서 글을 아는 여인과 평민도 읽게 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이승훈, 주문모 신부, 주문모를 숨겨 준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이 그해 처형되었고, 정약종의 형 정약전과 아우 정약용은 먼 곳으로 귀양 갔습니다. 이승훈은 박해 속에서 몇 차례 신앙을 버린다고 말했지만 끝내 죽임을 당했습니다. 많은 역사가는 이 박해에 조정의 당파 다툼도 얽혀 있었다고 봅니다.
그해 가을 제천 배론의 옹기 가마 굴에 숨어 있던 황사영(알렉시오)은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려고 비단에 긴 편지를 썼습니다 황사영 백서. 그는 박해를 낱낱이 알리면서, 서양 나라들이 군함을 보내고 청나라 황제가 조선 조정을 움직여 천주교를 허락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편지는 보내기 전에 붙잡혔고, 그가 처형된 뒤 박해는 한층 거세졌습니다. 이 편지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나라를 외국의 힘에 맡기려 한 일로 오래 비판받아 왔고, 살길을 찾던 신자의 절박한 호소로 읽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일은 천주교가 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온다는 의심을 조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남겼습니다.
목자를 기다린 교회: 기해박해와 김대건
신자들은 사제를 다시 얻으려고 애썼습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은 여러 차례 베이징을 오가며 사제를 청했고, 동료들과 함께 교황에게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베이징 교구에서 떼어 조선 대목구를 세우고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에 맡겼고, 1836년부터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차례로 몰래 들어왔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이 더 다치지 않도록 스스로 나아가 붙잡혔고, 두 신부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했습니다. 세 사람은 그해 9월 새남터에서 목 베였고, 붙잡힐 것을 내다보고 천주교를 변호하는 『상재상서』를 써 두었다가 붙잡힌 뒤 재상에게 올린 정하상도 이튿날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습니다.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은 이 박해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을 지켜 온 충청도 솔뫼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36년 모방 신부에게 뽑혀 최양업 등과 함께 마카오로 가서 공부했습니다. 1845년 8월 상하이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사제가 되었고, 그해 가을 작은 배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선교사들이 드나들 바닷길을 찾다가 황해도에서 붙잡혔고,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스물다섯의 나이로 순교했습니다. 두 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은 열두 해 동안 산골 교우촌을 걸어 다니며 신자들을 돌보다가 1861년 병과 과로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인박해와 103위 성인, 그리고 오늘
1866년 초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를 금하며 다시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비롯해 조선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열두 명 가운데 아홉이 처형되었고, 빠져나간 리델 신부가 중국에 알리자 그해 가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쳤습니다. 조정은 천주교인을 외적과 내통한 이들로 보았고, 한강 가 양화진의 절두산에서 많은 신자가 목 베였습니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무덤을 파헤치려 한 일에 프랑스 선교사 한 사람이 끼어 있던 것도 박해를 더 거세게 했습니다. 1870년대 초까지 이어진 이 박해로 순교한 이들을, 달레와 한국의 역사가들은 수천 명으로 헤아립니다.
이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지는 것은 다블뤼 주교가 목숨을 걸고 증언을 모아 두었기 때문이고, 파리 외방 전교회의 달레 신부는 그 기록을 바탕으로 1874년 『한국 천주교회사』를 펴냈습니다.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서울에 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김대건과 정하상을 비롯해 1839년과 1846년과 1866년 무렵의 박해에서 순교한 103위를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한국인 93위와 프랑스 선교사 10위였고, 천주교회는 이를 로마 밖에서 열린 첫 시성식으로 기억합니다. 2014년 8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에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로 선포했습니다. 천주교회는 해마다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키며 순교 성지에서 그들을 기억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또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합당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사막과 산과 동굴과 땅굴에서 떠돌아다녔느니라.
히 11:36-38
웨슬리는 세상이 합당치 아니하였다는 말을 "세상은 그토록 큰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라고 풉니다 웨슬리. 산속 교우촌에 숨어 옹기를 구우며 살던 조선의 신자들이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인에게도 이들은 이 땅의 첫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책을 읽고 따져 본 끝에 스스로 믿었고, 사제가 없을 때에도 모여 기도하며 서로 가르쳤습니다.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교우라 불렀고, 한글 교리서와 기도문이 글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라는 말씀대로 (마 10:28) 목숨보다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황사영의 편지는 복음을 힘센 나라의 힘에 기대려 할 때 무엇을 잃는지도 가르쳐 줍니다.
천주교회와 개신교회는 성례(천주교에서는 ‘성사’)와 교회의 직제, 성인을 기리는 방식에서 서로 다르게 믿지만, 같은 주님을 위해 피 흘린 이들 앞에서는 함께 고개를 숙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 2:10). 다음 과 개신교 선교와 한국 교회의 시작에서는 1832년 귀츨라프의 방문에서 시작해 병인박해가 일어난 바로 그해의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개신교의 이야기를 봅니다.
연습
- 연습 1 / 8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8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된 까닭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3 / 8
1801년 황사영의 백서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4 / 8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 연습 5 / 8
김대건(안드레아)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6 / 8
다음 박해를 일어난 차례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7 / 8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에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 연습 8 / 8
이 과가 말하는, 개신교인이 첫 한국 천주교인들에게서 배울 것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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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주제
출처
-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 1603년. 중국의 유학자와 서양 학자의 문답으로 천주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논하며, 옛 유교 경전의 상제를 천주와 잇는다. 조선의 학자들도 읽었다.
- 정약종, 주교요지 1790년대 / 1790s — 1790년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하기 전 정약종이 한글로 쓴 두 권의 교리서로, 글을 아는 여인과 평민도 읽을 수 있게 천주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상과 벌, 창조와 강생과 구속을 쉬운 말로 풀었다. 조선 사람이 한글로 쓴 첫 교리서로 꼽힌다.
- 황사영, 황사영 백서 1801 — 1801년. 신유박해 때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려고 비단에 쓴 편지로, 박해의 경과를 알리고 서양의 배를 보내 주고 청나라가 조선에 압력을 넣게 해 달라고 청했다. 편지가 발각되어 그는 처형되었고 박해는 더 거세졌다.
- 정하상, 상재상서 1839 — 1839년. 기해박해 때 붙잡힐 것을 내다보고 써 두었다가 붙잡힌 뒤 재상에게 올린 한문 글로, 천주교가 임금과 부모를 저버리는 가르침이 아니라 천주의 십계로 사람의 도리를 가르친다고 변호하며 신앙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한국인이 쓴 첫 호교론으로 꼽힌다.
- 샤를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1874 — 1874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달레가 다블뤼 주교가 모은 기록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엮은 한국 천주교회와 그 박해의 역사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