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20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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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쟁과 관용

종교개혁 뒤 한 세기 동안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서로 죽였습니다. 1572년 파리의 학살과 1618년부터 1648년까지의 30년 전쟁을 지나며, 낭트 칙령과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 같은 불완전한 평화와 함께 양심의 자유를 구하는 목소리가 자라났습니다.

뮌스터 시청의 회의실에서 검은 옷의 사절들이 탁자 둘레에 빽빽이 모여 서서 손을 들고 평화 조약에 서약하는 그림.
헤라르트 테르보르흐, 〈뮌스터 조약의 비준〉, 1648년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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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학살과 낭트 칙령

16세기 중엽 프랑스에서는 개혁파 신자들, 곧 위그노가 귀족과 도시민 사이에서 늘어났고, 1562년부터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양편 모두 잔혹했습니다. 위그노들은 성당의 성상을 부수었고, 1567년 남부의 도시 님에서는 가톨릭 사제와 시민 수십 명을 죽였습니다.

1572년 8월 18일 파리에서 개신교도인 나바라의 앙리와 왕의 누이 마르그리트가 결혼하자, 위그노 지도자들이 축하하러 파리에 모였습니다. 나흘 뒤 위그노의 지도자 콜리니 제독이 총에 맞아 다쳤고, 왕의 궁정은 위그노 지도자들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새벽 콜리니가 살해되었고, 파리 사람들은 이웃의 위그노를 남녀와 아이 가리지 않고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학살은 몇 주 동안 다른 도시로 번졌고, 파리에서만 수천 명이 죽었으며 프랑스 전체의 희생자 수는 역사가마다 크게 다르게 추산합니다.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소식을 반역 음모를 꺾은 일로 듣고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살아남은 나바라의 앙리는 1589년 앙리 4세로 즉위했고, 1593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1598년 그는 낭트 칙령을 내려 가톨릭을 나라의 종교로 두면서도 위그노에게 양심의 자유와 정해진 곳에서의 공적 예배를 허락했습니다 앙리 4세, 낭트 칙령. 그러나 루이 14세는 군인들을 위그노의 집에 머물게 하며 개종을 강요하던 끝에 1685년 이 칙령을 폐지했습니다. 수많은 위그노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와 프로이센으로, 멀리 아프리카 남쪽 끝까지 떠났습니다.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평화

넓은 방에서 칼을 찬 귀족들이 황제의 관리들을 붙잡아 열린 창밖으로 내던지고 있다.
〈1618년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 요한 필리프 아벨리누스의 『테아트룸 에우로파에움』, 17세기 · 출처

독일 땅에서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영주의 종교가 그 땅의 종교가 되었지만, 그 길은 루터교와 가톨릭에만 열려 있었습니다. 1618년 5월 프라하에서 가톨릭 합스부르크 왕 아래 자기들의 자유를 잃을까 두려워한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이 황제의 관리들을 성의 창밖으로 던졌고, 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이 일에서 시작된 전쟁은 30년 동안 제국 전체로 번졌습니다. 가톨릭 황제와 제후들에 맞서 개신교 제후들이 싸웠고, 덴마크와 1630년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개신교 편으로 들어왔습니다. 1631년 황제 편의 군대가 개신교 도시 마그데부르크를 함락했고, 역사가들은 그때 주민 대부분이 죽었다고 봅니다.

이 전쟁은 신앙만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가톨릭 추기경 리슐리외가 이끌던 프랑스는 1631년부터 개신교 나라 스웨덴에 돈을 댔고, 1635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직접 전쟁에 나섰습니다. 군대는 지나는 곳마다 약탈했고, 굶주림과 역병이 뒤따랐습니다. 역사가들은 독일 땅의 인구가 이 시기에 크게 줄었다고 보며, 그 추산은 저마다 다르지만 흔히 오분의 일에서 삼분의 일 사이입니다. 이 전쟁 중에 작센의 목사 마르틴 링카르트는 온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하자는 찬송(Nun danket alle Gott)을 지었고, 이 찬송은 오늘도 불립니다.

1648년 10월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에서 맺은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은 영주의 종교가 그 땅의 종교라는 원칙을 개혁파 교회에까지 넓히고, 영주와 신앙이 다른 신민에게도 집에서 예배할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했습니다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 그러나 그 땅의 신앙은 여전히 영주가 정했고, 세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 평화는 양심의 자유를 고백한 것이라기보다 전쟁에 지친 나라들의 타협이었습니다.

모든 편에서 고난받은 이들, 그리고 양심의 자유

재세례파는 가톨릭과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모두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취리히, 제네바, 스코틀랜드 과). 1534년 뮌스터에서 일부가 무력으로 도시를 차지한 일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1527년의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6조대로 칼을 들지 않고 고난을 견뎠습니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관용은 여러 길로 자랐습니다. 먼저 전쟁에 지친 나라들이 평화를 위해 하나 이상의 신앙을 견디기로 했고, 그리스도인의 확신에서 자유를 외친 이들도 있었습니다. 1612년 런던 가까이에 잉글랜드 땅의 첫 침례교회를 세운 토머스 헬위스는 그해 펴낸 『불법의 비밀에 관한 짧은 선언』에서, 이단이든 튀르크인이든 유대인이든 신앙 때문에 땅의 권세가 벌할 일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왕 제임스 1세에게 보낸 책에는 왕은 죽을 사람이요 하나님이 아니니 백성의 영혼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고 손으로 써 넣었고, 그는 감옥에 갇혀 1616년 무렵 죽었습니다.

청교도 목사 로저 윌리엄스는 위정자가 신앙의 일로 사람을 벌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등의 일로 1635년 매사추세츠에서 추방 판결을 받았고, 이듬해 양심 때문에 고난받는 이들의 피난처로 프로비던스를 세워 그곳에서 아메리카의 첫 침례교회를 세우는 데 함께했습니다. 1644년 런던에서 펴낸 『양심을 이유로 한 박해의 피비린내 나는 교리』에서 그는, 양심 때문에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며 유대인과 이교도에게도 양심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1677년에 나온 제2차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라고 고백하지만 21장 2항, 그릇된 의견을 위정자의 권세로 다스릴 수 있다는 웨스트민스터의 20장 4항은 싣지 않았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관용을 외쳤습니다. 1689년 존 로크는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나라의 권세는 세상의 일을 지키는 데 있고 참된 신앙은 마음의 확신이어서 억지로 만들 수 없다고 했지만, 무신론자와 외국 군주에게 충성하는 이들(흔히 가톨릭 신자로 읽힙니다)은 관용에서 뺐습니다. 볼테르 같은 이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잔혹함을 들어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했고, 교회는 그 비판에서도 배울 것이 있었습니다. 1689년의 잉글랜드 관용령은 국교회 밖의 개신교인에게 예배의 자유를 주었지만, 가톨릭 신자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들은 빠졌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고백하는 것

흰 회칠을 한 소박한 예배당에서 수녀와 주름 깃 목사, 메노파 농부 부부와 늙은 신부가 등을 보인 채 나란히 무릎 꿇고 기도한다.
여러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나란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

그 뒤 여러 교회가 신앙 때문에 사람을 죽인 일을 죄로 고백했습니다. 2000년 3월 ‘용서의 날’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리를 섬긴다며 쓴 폭력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해친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기억과 화해. 이보다 앞서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종교 자유 선언(인간 존엄성)』에서, 종교의 자유는 사람의 존엄에서 나오는 모든 이의 권리이니 누구도 신앙의 일에서 억지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2010년 루터교 세계연맹은 16세기 루터교도가 재세례파를 박해한 일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메노파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루터교 세계연맹, 재세례파 박해의 유산에 관한 결의.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고 (마 5:9),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이들이 되리니 그분께서는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느니라.

마 5:44-45

웨슬리는 이 대목에서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사랑으로 갚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십시오"라고 권합니다 웨슬리. 바울은 "가능하다면 너희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라"고 하고 (롬 12:18),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롬 14:4).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강한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고후 10:4

웨슬리는 믿음과 기도도 그리스도인의 갑주에 속하지만 이 무기는 "여기서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씁니다 웨슬리. 진리를 굳게 믿는 것과 남의 양심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구하는 자유를 남에게도 지키고, 칼이 아니라 말씀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역사가 남긴 교훈입니다. 다음 과 청교도와 경건주의에서는 잉글랜드와 독일에서 말씀대로 사는 삶을 구한 이들을 봅니다.

연습

  1. 연습 1 / 7

    1572년 8월 24일 파리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7

    1598년의 낭트 칙령은 위그노에게 무엇을 허락했습니까?

  3. 연습 3 / 7

    다음 사건을 일어난 차례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7

    30년 전쟁이 신앙만의 전쟁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일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7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7

    제2차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 21장 2항이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7

    2000년 3월 ‘용서의 날’에 요한 바오로 2세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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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앙리 4세, 낭트 칙령 1598 — 1598년. 위그노(프랑스 개혁파)에게 양심의 자유와 정해진 곳에서의 공적 예배를 허락했다. 1685년 루이 14세가 폐지했다.
  2. 신성 로마 제국·스웨덴·프랑스,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 1648 — 1648년. 30년 전쟁을 끝낸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의 조약으로, 영주의 종교가 그 땅의 종교가 된다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의 원칙을 개혁파 교회에까지 넓히고, 영주와 신앙이 다른 신민에게도 집에서 예배할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했다.
  3. 스위스 형제단,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1527 — 재세례파의 첫 신앙고백. 회개하고 믿는 이에게 주는 세례(1조), 세상과의 구별, 칼을 쓰지 않음(6조), 맹세하지 않음(7조) 등 일곱 조항.
  4. 토머스 헬위스, 불법의 비밀에 관한 짧은 선언 1612 — 1612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런던 가까이에 교회를 세운 헬위스가 펴낸 책으로, 이단이든 튀르크인이든 유대인이든 땅의 권세가 신앙 때문에 벌할 일이 아니라며 모든 이의 양심의 자유를 주장한다. 제임스 1세에게 보낸 책에는 왕은 죽을 사람이요 하나님이 아니니 백성의 죽지 않을 영혼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고 손으로 써 넣었고, 그는 감옥에 갇혀 1616년 무렵 죽었다.
  5. 로저 윌리엄스, 양심을 이유로 한 박해의 피비린내 나는 교리 1644 — 1644년. 프로비던스를 세운 윌리엄스가 런던에서 이름 없이 펴낸 책으로, 진리와 평화가 나누는 대화의 꼴로 보스턴의 목사 존 코튼에게 답하며, 양심 때문에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고 위정자의 칼은 영혼의 일에 쓸 수 없으니 유대인과 이교도에게도 양심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6. 존 로크, 관용에 관한 편지 1689 — 1689년. 라틴어로 쓰고 같은 해 영어로 옮겨진 편지로, 나라의 권세는 생명과 자유와 재산 같은 세상의 일을 지키는 데 있고 참된 종교는 마음의 내적 확신에 있어 억지로는 아무도 믿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신론자와 외국 군주에게 충성하는 이들(흔히 가톨릭 신자를 가리킨 것으로 읽힌다)은 관용에서 뺐다.
  7. 국제신학위원회·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 그리고 용서의 날 2000 — 2000년. 3월에 발표된 국제신학위원회의 문서는 교회가 지난날 그 자녀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는 근거를 밝히고, 같은 해 3월 12일 ‘용서의 날’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리를 섬긴다며 쓴 폭력,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해친 죄, 유대인에게 지은 죄 등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 자유 선언(인간 존엄성) 1965 — 1965년 12월 7일. 모든 사람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그 뿌리는 사람의 존엄에 있으니, 누구도 종교의 일에서 자기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받거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막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가톨릭 교회의 선언이다.
  9. 루터교 세계연맹, 재세례파 박해의 유산에 관한 결의 2010 — 2010년 7월 슈투트가르트 총회. 16세기 루터교도가 재세례파를 박해한 일과 루터교 신앙고백의 정죄가 그들을 치는 데 쓰인 일을 깊이 뉘우치며, 하나님과 메노파 형제자매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