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18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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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제네바, 스코틀랜드

1523년 취리히에서 츠빙글리가 시의회와 함께 교회를 성경으로 다시 세우기 시작했고, 1525년 그의 젊은 동료들은 믿음을 고백한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다 같은 도시의 손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온 칼뱅은 피난민의 도시에서 교회의 질서를 세웠고, 1560년 스코틀랜드는 존 녹스와 함께 개혁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검은 모자와 검은 겉옷을 입은 츠빙글리가 옆얼굴을 보이며 두 손으로 두꺼운 책을 펼쳐 든 초상화.
한스 아스퍼, 〈울리히 츠빙글리〉, 1549년 · 출처

연표에서 보기

취리히: 사순절의 소시지에서 공개 토론까지

비텐베르크의 소식이 퍼지던 무렵 스위스의 취리히에서도 개혁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1519년부터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였던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는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차례로 강해했습니다. 그가 가르친 것은 신학 과정의 츠빙글리, 칼뱅, 개혁파 신학 과에서, 개혁교회가 걸어온 길의 개요는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종교개혁 이야기 과에서 다룹니다.

1522년 사순절, 인쇄업자 크리스토프 프로샤우어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절기에 훈제 소시지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츠빙글리는 먹지 않았지만, 곧 그리스도인은 음식을 가려 먹는 일에서 자유롭고 성경은 이 금식을 명하지 않는다고 설교하고 그 설교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

롬 14:17

다툼이 커지자 1523년 1월 취리히 시의회는 공개 토론을 열었고, 콘스탄츠 주교의 대리인들도 그 자리에 왔습니다. 츠빙글리는 『67개 조항』을 내놓고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시요 중보자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시의회는 그가 설교를 이어 가고 모든 설교자는 성경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전하라고 결정했습니다. 그 뒤로도 무엇을 언제 바꿀지는 시의회가 정했고, 교회에서 성상은 1524년에, 미사는 1525년 부활절에 사라졌습니다.

1525년의 세례와 리마트 강

잔잔한 리마트강을 따라 여러 층의 집들이 늘어선 취리히 시가지가 있고, 그 뒤 언덕 위에 큰 학교 건물이 보인다.
포토글로브사, 〈취리히 리마트 강변〉, 1890–1900년 무렵 (미국 의회도서관) · 출처

츠빙글리에게 배우던 젊은이들 가운데 콘라트 그레벨과 펠릭스 만츠는 개혁이 시의회의 걸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이들의 모임으로 읽고 유아세례를 거부했습니다. 1525년 1월 시의회가 모든 아기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자, 후대 연대기에 따르면 1월 21일 밤 만츠의 어머니 집에 모인 이들이 서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재세례파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신학 과정의 재세례파와 급진 종교개혁 과에서 봅니다.

1526년 시의회는 다시 세례를 주는 자를 물에 빠뜨려 죽이기로 정했고, 츠빙글리는 이를 막지 않았습니다. 그레벨은 그해 역병으로 죽었고, 1527년 1월 5일 만츠는 손발이 묶인 채 리마트 강에 던져졌습니다. 개혁을 외친 도시가 같은 개혁에서 나온 신자를 죽인 것입니다. 루터교회를 따르는 영주들의 땅에서도, 가톨릭 교회(천주교)를 따르는 땅에서도 많은 재세례파가 같은 길을 갔습니다.

2010년 7월 슈투트가르트에 모인 루터교 세계연맹 총회는 16세기 루터교도가 재세례파를 박해한 일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그 후예인 메노파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루터교 세계연맹, 재세례파 박해의 유산에 관한 결의. 그보다 앞선 2004년 6월 취리히의 개혁교회는 지난날의 박해가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며 재세례파의 후예들과 화해의 예배를 드렸고, 만츠가 죽은 강가에는 그 일을 기억하는 기념판이 세워졌습니다 재세례파와의 화해와 리마트 강가의 기념판.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만난 루터와 츠빙글리는 열네 조항과 열다섯째 조항의 대부분에 합의했지만 성찬에서 갈라졌습니다 마르부르크 조항. 1531년 츠빙글리는 가톨릭을 따르는 주들과 싸운 카펠 전투에 취리히 군대와 함께 나갔다가 전사했습니다.

제네바: 피난민의 도시

프랑스 사람 장 칼뱅(1509–1564)은 박해를 피해 1536년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를 낸 뒤, 그해 제네바를 지나다 기욤 파렐에게 붙들려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1538년 권징과 성찬을 두고 시의회와 부딪쳐 쫓겨난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마르틴 부처와 함께 프랑스 피난민 교회를 섬겼고, 그곳에서 재세례파였다가 그의 권유로 개혁교회에 들어온 사람의 과부 이델레트 드 뷔르와 결혼했습니다.

1541년 9월 제네바의 부름을 받고 돌아온 칼뱅은 11월 『제네바 교회 법규』를 받아들이게 하여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을 세웠습니다. 목사와 장로로 이루어진 치리회는 교인들을 불러 다툼을 화해시키고 죄를 꾸짖었으며, 이를 간섭으로 여긴 시민들과의 다툼은 1555년 무렵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제네바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에서 박해를 피한 이들이 몰려왔습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받아들였고"라는 주님의 말씀이 (마 25:35) 이 도시의 일이 되었습니다. 1559년 테오도르 베자를 원장으로 문을 연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배운 많은 목사가 목숨을 걸고 프랑스로 돌아가 숨어 모이는 교회들을 섬겼습니다.

그림자도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한 스페인 의사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프랑스 비엔에서 가톨릭 종교재판을 받던 중 감옥을 빠져나왔습니다. 1553년 8월 제네바의 예배에 나온 그는 정체가 드러나 붙잡혔습니다. 칼뱅이 고발에 앞장섰고 다른 스위스 개혁교회들도 처벌에 동의하여, 시의회는 10월 27일 그를 샹펠 언덕에서 불태웠습니다. 칼뱅이 청한 것은 덜 잔혹한 처형이었고, 그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바젤의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은 다른 이름으로 『이단자에 관하여』를 펴내,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글을 모아 이단이라는 까닭으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습니다. 같은 해 칼뱅을 반박하려고 썼으나 1612년에야 인쇄된 글에서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1903년 칼뱅을 따르는 이들은 그 자리에 속죄의 비석을 세웠습니다.

스코틀랜드, 그리고 퍼져 간 개혁교회

높은 설교단에서 녹스가 몸을 내밀고 팔을 뻗어 설교하고, 그 아래 귀족과 귀부인들, 주교들이 앉아 듣는다.
조지 토머스 두(데이비드 윌키 원화), 〈존 녹스의 설교〉, 19세기 (암스테르담 박물관) · 출처

존 녹스(1572년 죽음)가 따르던 설교자 조지 위샤트는 1546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듬해 녹스는 그곳 성에 모인 개신교도들의 설교자가 되었으나, 성이 프랑스 군대에 함락되자 열아홉 달 동안 갤리선의 노를 저었습니다. 풀려나 잉글랜드에서 설교하던 그는 가톨릭 여왕 메리 1세가 즉위하자 대륙으로 피했습니다. 1556년부터 제네바의 잉글랜드 피난민 교회 목사였던 그는 그해 12월 런던의 벗 앤 로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도시를 사도 시대 이후 땅 위에 있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불렀습니다 녹스, 앤 로크에게 보낸 편지.

1559년 그가 돌아와 퍼스에서 설교한 뒤 성난 무리가 성상을 부수고 수도원들을 약탈했습니다.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은 개신교 귀족들 앞에서 프랑스 군대가 물러가자,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녹스와 동료들이 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을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끊고 미사를 금했으며, 세 번째로 어기는 이는 죽이도록 정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웨스트민스터 이전 스코틀랜드 교회의 기준이 되었고, 이 교회는 장로들이 함께 다스리는 장로교회로 자랐습니다.

개혁교회는 여러 나라로 퍼졌습니다. 1563년 독일 팔츠의 교회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펴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몸도 영혼도 나 자신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

저지대에서는 1561년 귀도 드 브레가 박해받던 교회들을 위해 벨직 신앙고백을 썼고, 그 자신은 1567년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위그노라 불린 프랑스의 개혁파 신자들은 긴 종교 전쟁을 겪게 됩니다(종교 전쟁과 관용 과). 세월이 흘러 1887년 만주의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는 한국인 조력자들과 함께 첫 한글 신약 전서를 펴냈고 존 로스 외, 예수셩교젼셔, 오늘 한국 개신교의 큰 줄기인 장로교회도 이 가족에 속합니다(한국의 장로교회 과).

스코틀랜드 교회를 비롯한 여러 장로교회는 모세가 본 불붙은 떨기나무를 표지로 씁니다.

주의 천사가 떨기나무의 한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니라. 그가 보니, 보라, 그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출 3:2

박해의 불 속에서도 교회가 소멸되지 않은 것은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박해받던 이들도 힘을 얻자 남을 물에 빠뜨리고 불태웠다는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개혁교회가 물려준 강해 설교와 요리문답과 장로의 돌봄과 나그네를 맞는 일을 감사히 이어 가되, 만츠와 세르베투스를 기억하며 우리 전통의 죄도 고백해야 합니다. 다음 과 가톨릭 개혁과 세계 선교에서는 같은 시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어난 개혁과 선교를 봅니다.

연습

  1. 연습 1 / 8

    1522년 사순절 취리히의 소시지 사건 뒤에 츠빙글리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8

    1523년 1월 취리히의 공개 토론 뒤에 개혁을 결정한 것은 누구였습니까?

  3. 연습 3 / 8

    1527년 1월 펠릭스 만츠를 리마트 강에 빠뜨려 죽인 것은 누구였습니까?

  4. 연습 4 / 8

    2010년 루터교 세계연맹이 메노파에게 한 일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8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온 칼뱅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8

    1553년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8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8. 연습 8 / 8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를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끝까지 읽으면 읽음이 됩니다. 눌러서 끄고 켤 수 있습니다.

출처

  1. 울리히 츠빙글리, 67개 조항 1523 — 취리히 첫 공개 토론을 위한 조항.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자 중보자이심을 고백한다.
  2. 루터교 세계연맹, 재세례파 박해의 유산에 관한 결의 2010 — 2010년 7월 슈투트가르트 총회. 16세기 루터교도가 재세례파를 박해한 일과 루터교 신앙고백의 정죄가 그들을 치는 데 쓰인 일을 깊이 뉘우치며, 하나님과 메노파 형제자매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3. 취리히 개혁교회, 재세례파와의 화해와 리마트 강가의 기념판 2004 — 2004년 6월. 취리히 개혁교회가 재세례파를 기억하는 모임을 열어 지난날의 박해를 잘못으로 인정하고 그 후예인 메노파 등과 화해의 예배를 드렸으며, 펠릭스 만츠를 비롯한 재세례파가 빠뜨려져 죽은 리마트 강가에 그 일을 기억하는 기념판이 세워졌다.
  4. 루터와 츠빙글리, 마르부르크 조항 1529 — 루터파와 개혁파가 열네 조항과 열다섯째 조항의 대부분에 합의했으나,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에 대해서는 갈라졌다.
  5.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 개혁파 신학의 대표 저작. 첫 판은 1536년 바젤에서 나온 작은 책이었고, 1559년의 마지막 판까지 고쳐 쓰며 늘어났다. 1권 7–8장은 성경의 권위가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확증된다고 하고, 성경의 신빙성을 보이는 증거들(8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이차적인 도움이라고 한다. 읽기
  6. 장 칼뱅, 제네바 교회 법규 1541 —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으로 제네바 교회의 질서를 세웠다.
  7.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 이단자에 관하여 1554 — 1554년. 세르베투스가 불탄 이듬해 바젤에서 마르티누스 벨리우스라는 이름으로 펴낸 책으로,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글을 모아 이단이라는 까닭으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호소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라는 말은 같은 해 칼뱅에게 맞서 쓰고 1612년에야 인쇄된 『칼뱅의 책에 맞서』에 나온다.
  8. 존 녹스, 앤 로크에게 보낸 편지 1556 — 1556년 12월 9일. 제네바에서 런던의 벗 앤 로크에게 보낸 편지로, 제네바를 사도 시대 이후 땅 위에 있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 부르며,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가 참되게 전파되지만 삶과 신앙이 이토록 진실하게 개혁된 곳은 보지 못했다고 쓴다.
  9. 존 녹스 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60 —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이전 스코틀랜드 교회의 기준이었다.
  10. 존 로스 외, 예수셩교젼셔 1887 — 만주에서 존 로스와 한국인 조력자들이 옮긴 첫 한글 신약 전서.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