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 8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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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변증

전제 변증은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함께 설 중립 지대는 없다고 보고, 논리와 과학과 도덕은 성경의 하나님을 전제할 때에만 설 수 있음을 보이는 길입니다. 믿지 않는 생각의 전제가 이성과 의미를 떠받치지 못함을 드러낸 뒤 그리스도를 전하며, 코넬리우스 반 틸이 세우고 그레그 반센과 존 프레임이 이었습니다.

깊은 바위 협곡을 가로지른 옛 돌다리를 아래 강바닥에서 올려다본 모습으로, 아치 꼭대기의 이맛돌에 저녁 햇살이 닿고 지팡이를 짚은 나그네가 다리를 건넌다.
깊은 협곡에 걸린 옛 돌다리와 그 이맛돌

중립 지대는 없다

변증의 다섯 길 가운데 전제 변증은 출발점을 묻습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코넬리우스 반 틸(1895–1987)이 이 길을 세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가능한지를 가늠하는 마지막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전제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기준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각은 결국 사람 자신의 마음을 마지막 판단자로 삼습니다. 둘 다 아닌 출발점은 없으니, 믿음과 불신앙 사이에 중립 지대는 없다는 것이 반 틸의 생각입니다 코넬리우스 반 틸, 믿음의 변호.

반 틸은 이것을 성경에서 읽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고 (잠 1:7), 모든 지혜와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 2:3

매튜 헨리는 여기에 "지혜의 보화는 우리에게서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바울은 또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조심하라 하고 (골 2:8),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한다고 합니다 (고후 10:5). 생각에도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반 틸이 믿지 않는 이와 아무것도 함께 갖지 않았다고 본 것은 아닙니다. 그가 부인한 것은 중립 지대이지 공통의 바탕이 아닙니다. 둘은 같은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며, 무엇보다 믿지 않는 이도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붙잡아 두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8-19

믿지 않는 이는 하나님을 알되 그 진리를 붙잡아 두고 있습니다 (롬 1:18-21). 반 틸은 이 앎을 대화의 접촉점으로 보았습니다. 장 칼뱅이 가르친 ‘신성에 대한 감각’입니다. 칼뱅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자기 신성에 대한 이해를 심어 두셨기에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자기들을 지으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고 씁니다 기독교 강요 1.3.1. 반 틸은 믿지 않는 이가 하나님을 부인할 때조차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빌려 쓴다고 보았고, 아버지 무릎에 안겨 있어야만 아버지의 뺨을 칠 수 있는 아이의 그림을 들곤 했습니다.

초월 논증과 그 뿌리

펼친 두 면에 빨강·파랑·노랑의 삼각형과 정사각형이 등호와 함께 줄지어, 직각삼각형 빗변 위의 정사각형이 다른 두 변 위의 정사각형을 합한 것과 같음을 한 단계씩 보여 줍니다.
올리버 번, 『유클리드 원론 첫 여섯 권』의 피타고라스 정리 증명, 런던, 1847년 · 출처

이 바탕 위에서 반 틸은 ‘초월 논증’을 폈습니다. 어떤 것에서 그 원인으로 거슬러 오르는 대신, 무엇이 참이어야 생각과 앎 자체가 가능한지를 묻는 논증입니다. 우리는 논리의 법칙이 어디서나 통한다고 믿고, 자연이 내일도 같은 질서를 따르리라 믿기에 과학을 하며, 어떤 일은 누구에게나 정말 그르다고 압니다. 반 틸은 이것들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곧 성경의 하나님이 계실 때에만 설명된다고 보았습니다. 시편의 말처럼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빛을 보리이다" (시 36:9).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전제하지 않으면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가 참이라는 증명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길은 이것을 ‘반대의 불가능성’이라 부릅니다.

방법도 여기서 나옵니다. 먼저 논증을 위해 잠시 믿지 않는 이의 자리에 서서, 그 전제가 이성과 의미를 떠받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곳을 보여 줍니다. 다음에 상대를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청해, 거기서는 이성과 과학과 도덕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을 보입니다. 그리고 논쟁의 승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며 회개를 청합니다.

이 길의 뿌리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에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학문을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4강.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일반 은총으로 죄를 억제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학문과 문화의 재능을 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카이퍼, 일반 은총. 헤르만 바빙크는 하나님을 아는 앎이 추론으로 얻어지기 전에 먼저 사람 안에 심겨 있다고 보았고, 하나님 존재 증명은 믿음을 낳는 기초라기보다 믿는 이가 창조 세계에서 알아보는 증언이라고 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 교의학.

반 틸의 제자 그레그 반센은 이 논증을 무신론자들과의 공개 토론에서 펼쳐 널리 알렸습니다. 존 프레임은 반 틸의 길을 이으면서 더 부드러운 꼴로 다듬었습니다 존 프레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변증. 그는 중립 지대가 없다는 생각을 지키되, 그 전제 안에서는 증거와 전통적인 논증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봅니다. 우주론적 논증이나 부활의 증거도 성경의 하나님을 가리킨다면 초월 논증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실제로 많은 것을 함께 안다는 것을 넉넉히 인정합니다.

강점과 비판

이 길의 강점은 죄가 생각에 미친 영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판결을 기다리는 가설로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개별 사실보다 그 사실을 읽는 눈, 곧 세계관의 뿌리까지 내려가며, 믿지 않는 이도 하나님께 기대어 산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와 성경이 처음부터 중심에 있습니다.

비판도 셋 있습니다. 첫째, 증명해야 할 하나님을 처음부터 전제하니 순환논증이라는 비판입니다. 전제 변증은 마지막 권위는 무엇이든 제 빛으로 변호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성이 믿을 만하다는 것도 이성을 써서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음은 원이 있느냐가 아니라 어느 원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품느냐이고, 프레임은 성경의 전제 위에서 많은 증거를 함께 내놓는 넓은 원을 권합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증명하는 것은 순환논증이 아닌가?). 둘째, 중립 지대가 없다면 무엇으로 대화하느냐는 비판입니다. 대답은 반 틸 자신이 공통의 바탕을 부인하지 않았고, 프레임의 부드러운 꼴은 함께 아는 사실에서 기꺼이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추상적이고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단언하는 듯 들려서 아직 설득되지 않은 이에게 가 닿기 어렵다는 비판입니다. 전제 변증가들은 사람을 설득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고, 논리를 왜 믿는지 옳고 그름은 어디서 오는지 묻는 일은 쉬운 말로도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같은 개혁파 안에서도 이 길은 논쟁이 되었습니다. 앞 세대 프린스턴의 B. B. 워필드는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증거를 따질 이성을 함께 가졌고, 기독교는 그 앞에서 자기를 변호할 수 있으며 또 변호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고전 변증과 증거 변증 과). 그도 죄가 생각을 어둡게 했고 믿음은 성령께서 주신다고 믿었지만, 성령께서는 증거와 함께 믿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반 틸은 워필드의 성경관과 기독교가 공적으로 변호되어야 한다는 그의 확신을 높이 샀으나, 믿지 않는 이의 이성이 증거 앞에서 중립적인 판단자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개혁파의 죄론과 맞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워필드 쪽에서 보면 그것은 죄인에게도 증거를 따질 능력이 남아 있다는 말일 뿐, 이성이 하나님 앞에서 중립이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갈린 것은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을 받아들이기 전에 같은 자리에서 증거를 함께 따질 수 있느냐였습니다. 이 과정은 어느 쪽도 고르지 않습니다.

대화에서

푸르스름한 새벽 안개 속 항구 위로 주황빛 해가 떠오르고, 물 위에 그 빛이 길게 비치며 작은 배들이 어둡게 떠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파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 출처

전제 변증은 대화에서 출발점을 함께 살펴보자는 초대가 됩니다. 친구가 과학과 논리만 믿는다고 하면 비웃지 말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자연이 내일도 같은 법칙을 따르리라는 것, 논리가 어디서나 통한다는 것, 어떤 일은 정말 그르다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하느냐고 말입니다. 그 물음은 상대를 몰아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하나님의 세계에 기대어 살고 있음을 함께 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사로잡을 것은 생각이지 사람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생각도 먼저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합니다. 웨슬리는 고린도후서 10:5를 풀며, 사로잡힌 마음이 그리스도께 믿음의 순종을 드리려고 "자기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자기를 내어 준다고 씁니다 웨슬리. 다음 과 개혁파 인식론과 누적 논증에서는 논증 없이도 합리적인 믿음, 그리고 여러 실마리를 함께 모으는 길을 살핍니다.

연습

  1. 연습 1 / 8

    반 틸이 믿음과 불신앙 사이에 중립 지대가 없다고 한 뜻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8

    로마서 1:18-21에서 반 틸이 대화의 접촉점으로 본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8

    반 틸의 초월 논증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8

    반 틸이 말한 변증의 차례로 맞는 것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8

    존 프레임은 반 틸의 길을 어떻게 이어받았습니까?

  6. 연습 6 / 8

    전제 변증은 순환논증이라는 비판에 어떻게 대답합니까?

  7. 연습 7 / 8

    같은 개혁파인 워필드와 반 틸이 갈린 물음은 무엇입니까?

  8. 연습 8 / 8

    친구가 자기는 과학과 논리만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과가 권하는 대화는 무엇입니까?

끝까지 읽으면 읽음이 됩니다. 눌러서 끄고 켤 수 있습니다.

출처

  1. 코넬리우스 반 틸, 믿음의 변호 — 1955년. 그리스도인과 불신자가 중립 지대를 공유하지 않으며, 변증은 성경의 하나님을 전제할 때만 사고와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일이라고 말한다(전제 변증).
  2.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 개혁파 신학의 대표 저작. 첫 판은 1536년 바젤에서 나온 작은 책이었고, 1559년의 마지막 판까지 고쳐 쓰며 늘어났다. 1권 7–8장은 성경의 권위가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확증된다고 하고, 성경의 신빙성을 보이는 증거들(8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이차적인 도움이라고 한다. 읽기
  3.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 1898년 프린스턴의 스톤 강연. 거듭난 이와 거듭나지 않은 이는 학문을 다른 출발점에서 한다고 말한다(4강 칼빈주의와 학문). 1강에서는 변증이 교회를 한 걸음도 나아가게 하지 못했다며, 한 삶의 체계에는 다른 삶의 체계로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4. 아브라함 카이퍼, 일반 은총 1902–1904 — 하나님이 죄를 억제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선물을 베푸시어 문화와 학문이 자라게 하신다는 가르침.
  5. 헤르만 바빙크, 개혁 교의학 1895–1901 — 개혁파 신학을 집대성한 교의학. 일반 은총과 창조의 회복을 강조한다. 2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람 안에 심겨 있다고 하고, 하나님 존재 증명들을 그 지식을 증언하는 증거로 본다.
  6. 존 프레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변증 — 1994년. 반 틸의 전제 변증을 이어받되, 증거와 논증도 그 안에서 쓸 수 있다고 보며, 변증을 증명, 변호, 공격의 세 면으로 본다. 모든 논증은 마지막 기준을 전제하므로 어느 정도 순환하지만, 좁은 순환이 아니라 넓은 순환, 곧 많은 증거를 끌어오는 논증이어야 한다고 한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변증의 여러 방법과 논증, 반론을 그 주장하는 이들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하며, 어느 한 방법만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