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전 설교 다섯 편
찰스 스펄전 · 1855–1858년
영어 본문: 스펄전의 원문, 『뉴 파크 스트리트 강단』 1·4·5권 · CCEL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런던의 젊은 침례교 목사 찰스 스펄전이 1855–1858년 주일 아침에 전한 설교 다섯 편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모든 사람을 향한 값없는 복음의 초청을 한 강단에서 함께 붙든 19세기 복음주의 설교의 본보기입니다.
뉴 파크 스트리트의 젊은 목사
찰스 해든 스펄전(1834–1892)은 잉글랜드 에식스의 켈베던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독립교회(회중교회) 목사였고, 그는 어린 시절 여러 해를 할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지내며 그곳 서재의 청교도 책들을 일찍부터 읽었습니다. 1850년 1월, 열다섯 살의 그는 눈보라 때문에 가려던 교회에 가지 못하고 콜체스터의 작은 감리교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회상으로는 그날 목사가 오지 못해 한 평신도가 강단에 섰고, 그 설교자가 붙든 말씀은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여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였습니다 (사 45:22). 그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돌아섰습니다.
그 뒤 신약을 읽으며 세례는 믿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 그는 그해 5월 강물에서 신자의 세례를 받고 침례교인이 되었습니다. 열일곱 살에는 케임브리지 근처 워터비치 마을 교회의 목회를 맡았고, 1854년 열아홉 살에 런던 사우스워크의 뉴 파크 스트리트 침례교회 목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17세기부터 이어져 온 칼뱅주의 침례교회(특수침례교회)로, 18세기의 신학자 존 길도 이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스펄전은 자기를 그 ‘위대하고 존경받는 길 박사의 후계자’라고 부릅니다 207.17.
그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배당은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1855년 예배당을 넓히는 동안 회중은 스트랜드 거리의 큰 집회장 엑서터 홀에서 모였고, 1856년 가을부터는 런던 남쪽의 유원지 로열 서리 가든스에 있는 뮤직 홀을 빌려 모였습니다. 그 홀에서 처음 드린 1856년 10월 19일 저녁 예배에서,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불이야 하고 외치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출구로 몰려 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뒤로 회중은 그 홀에서 주일 아침마다 모였습니다. 스펄전은 이 일로 깊은 충격을 받았고, 평생 여러 번 찾아온 우울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우울증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 회중은 1861년 새로 지은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로 옮겨 갔습니다.
그의 설교는 1855년 1월부터 매주 한 편씩 값싼 소책자로 인쇄되었습니다. 속기사가 받아 적은 원고를 그가 손보아 펴냈고, 한 해의 설교는 『뉴 파크 스트리트 강단』(The New Park Street Pulpit)으로 묶였으며, 1861년부터는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 강단』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인쇄 설교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은 원고로 여러 해 동안 이어졌고, 여러 나라 말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목회자 학교와 고아원을 세웠고, 말년에는 성경의 권위와 속죄의 가르침이 흐려진다고 경고하며 침례교 연맹을 떠났으며, 1892년 남프랑스 망통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흔히 ‘설교의 황태자’, ‘마지막 청교도’라고 불리는 그의 자리는 신학 과정의 19세기 복음주의와 선교, 그리고 한국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일 아침의 다섯 편
이 서재에 실린 것은 스무 살에서 스물네 살 사이의 젊은 스펄전이 주일 아침에 전한 설교 다섯 편입니다. 각 부분의 번호는 『뉴 파크 스트리트 강단』의 설교 번호입니다. 1번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1855년 1월 7일 뉴 파크 스트리트 채플에서 전한 설교로 이 인쇄 설교의 첫 번호이고, 7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같은 해 2월 엑서터 홀에서 전한 설교로 7–8번, 두 번호를 한데 차지했습니다. 나머지 세 편은 1858년 뮤직 홀에서 전한 것으로, 8월의 207번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과, 12월에 두 주 잇달아 전한 227번 「강권하여 데려오라」와 228번 「보혈」입니다.
다섯 편은 그의 설교를 떠받치는 두 기둥을 보여 줍니다. 앞의 두 편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적 은혜를 높이고, 「강권하여 데려오라」는 그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내밉니다.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은 그 둘을 한 설교 안에 나란히 세우며, 「보혈」은 둘이 함께 가리키는 한가운데, 곧 그리스도의 피로 돌아갑니다.
그가 평생 남긴 인쇄 설교는 수천 편에 이르지만, 이 서재에는 이 다섯 편만 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에서 서른 해 동안 전한 설교, 여러 권에 이르는 시편 강해, 날마다 읽는 아침과 저녁의 묵상,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한 강의, 말년의 논쟁 글은 싣지 않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대개 같은 틀을 따릅니다. 맨 앞에 설교한 날과 곳, 그리고 본문이 있고(이 서재에서는 227.text 같은 자리입니다), 짧은 서론 뒤에 로마 숫자로 몇 개의 대지를 세워 그 안을 1, 2, 3으로 나누며, 사이사이 찬송 몇 줄을 넣고, 끝에서는 성도와 죄인에게 따로 권면합니다. 서재의 자리 번호는 단락의 차례여서, 227.12는 「강권하여 데려오라」의 열두째 단락입니다. 이 서재의 영어 본문은 『뉴 파크 스트리트 강단』 1·4·5권에 실린 스펄전 자신의 글입니다.
두 선을 함께
스펄전은 첫 설교를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배울 수 있는 가장 높은 학문이라는 말로 엽니다 1.1. 그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주라 변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 소멸되지 아니하였느니라.
말 3:6
그는 하나님이 그 본질과 속성에서, 계획과 약속과 경고에서, 그리고 사랑하시는 이들에게서 변하지 않으신다고 풀고, 히스기야의 기도 앞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냐는 반문에도 답합니다 1.20. 이 물음은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는가?에서도 다룹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불변성은 차가운 교리가 아니라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저를 사랑하셨다면, 그분은 저를 영원히 사랑하실 것입니다’ 1.14. 하나님은 처음부터 행위를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니 지금도 행위와 상관없이 사랑하시고, 그래서 그분의 백성은 끝까지 보존된다는 것, 곧 성도의 견인입니다 1.31.
한 달 뒤 엑서터 홀에서 그는 바울의 말씀을 본문으로 삼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니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
고전 1:23-24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행위 없이 믿음으로 받는 칭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 변하지 않는 선택의 사랑, 택하신 백성을 위한 특별한 구속, 성도의 견인을 전하지 않고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칼뱅주의는 복음이요, 다른 무엇도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7.3. 이어서 그는 복음을 거절하는 두 부류를 그립니다. 겉모양의 종교를 붙든 유대인과 세상 지혜를 자랑하는 헬라인인데, 그 유대인 가운데에는 자기가 침례교인이니, 또는 성공회 교인이니 천국에 가리라고 여기는 사람도 들어 있습니다 7.7.
그리고 그는 부르심을 둘로 나눕니다. 모든 사람이 듣는 일반적인 부르심이 있고, 하나님이 자녀를 이름으로 부르시는 특별하고 효과적인 부르심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앞의 것을 외칠 뿐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부르심을 주실 수 있으니, 저는 그 일을 그분께 맡깁니다’ 7.15. 개혁파가 효과적 부르심이라고 부르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그렇게 부르실 수 있다면, 설교자는 왜 사람들에게 오라고 간청해야 합니까? 세 해 남짓 뒤 뮤직 홀에서 그는 이 물음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하되 오직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가 종일토록 내 손을 내밀어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하게 하였노라, 하느니라.
롬 10:20-21
‘진리의 체계는 곧은 선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207.2. 20절은 선택과 주권적 은혜를 가르칩니다. 구원은 공로 없이 오며,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스펄전은 회심한 무렵의 자기가 철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주님을 찾았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다가, 어느 날 무엇이 자기를 찾게 했느냐고 묻고서야 은혜의 교리를 분명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207.6. 21절은 사람의 책임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진심으로 손을 내미셨고, 멸망하는 사람은 자기 불순종 때문에 멸망합니다 207.10. 두 진리를 어떻게 맞추느냐는 물음에 그는 ‘그 둘은 조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207.16. 두 선은 거의 평행하여 사람의 눈에는 만나지 않지만, 영원 속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두 방향을 향합니다. 한쪽에는 그의 칼뱅주의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본분이 아니라고 보아, 그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촉구하지 않는 일부 칼뱅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스펄전은 그들을 극단적 칼뱅주의자라고 부르며, 그들이 회개와 믿음을 사람의 본분이라고 가르치는 자기 같은 이들을 ‘잡종 칼뱅주의자’라고 부른다고 전합니다 207.9. 그는 교회의 옛 목사 길을 존경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저의 랍비는 아닙니다’ 207.17. 그에게 기준은 성경이고, 성경은 진리를 두 극단 사이가 아니라 두 극단 모두에 둡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구원받는 이유를 물으면 은혜, 은혜, 은혜라고 답하지만, 왜 사람들이 저주를 받느냐고 물으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반율법주의자보다 훨씬 더 옳습니다’라고 말합니다 207.17. 반율법주의자는 본래 율법이 신자를 매지 않는다고 하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스펄전은 이 말을 극단적 칼뱅주의 쪽에 씁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시므로 사람은 책임을 질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면 ‘곧바로 반율법주의나 숙명론으로 내몰립니다’ 207.2. 이 균형은 그만의 것이 아닙니다. 도르트 신경도 불신앙의 죄책은 사람에게 있고 믿음과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라고 고백하며 첫째 교리 5항, 복음의 약속을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전하라고 말합니다 둘째 교리 5항.
이 균형이 강단에서 어떻게 들리는지는 넉 달 뒤의 「강권하여 데려오라」가 보여 줍니다. 스펄전은 서론도 없이 큰 잔치 비유의 한 구절로 곧장 들어갑니다.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그들을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라" (눅 14:23). 아우구스티누스가 편지에서 도나투스파를 국가의 힘으로 교회에 돌아오게 하는 일을 이 구절로 변호한 뒤, 이 말씀은 오래도록 신앙을 강요하는 근거로 인용되었습니다. 스펄전의 강권은 다릅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불구가 된 자와 다리를 저는 자와 눈먼 자를 하나하나 찾아낸 뒤, 소식을 전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하고, 자기 체험으로 권하고, 죽음과 심판으로 경고하고, 마지막에는 울며 기도합니다. ‘말과 눈물은 복음 사역자들이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227.23. 그가 말하는 억지는 칼이 아니라 말과 눈물, 곧 설득과 사랑이며,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한 그 간청입니다 (고후 5:20).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는 ‘저는 당신을 믿음으로 초대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초대하러 왔습니다’라고 답합니다 227.22. 먼저 자기 믿음을 들여다보지 말고 갈보리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는 7.15와 같은 자리에서 끝납니다. ‘저는 여러분을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열쇠를 가지신 하나님의 영이시여, 주님은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실 수 있습니다’ 227.25. 간청이 닿지 못하는 마음을 여시는 분은 그 열쇠를 가지신 성령이십니다. 두 선은 한 설교 안에서, 사람을 향한 간청과 성령을 향한 기도로 함께 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설교들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여 왔습니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그를 도르트와 웨스트민스터의 교리를 값없는 초청과 함께 전한 설교자로 사랑하고, 많은 이가 두 진리를 사람의 이치로 억지로 잇지 않는 그의 겸손을 따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하나님이 모든 일을 정하시되 그로써 피조물의 의지가 억눌리지 않고 제이 원인들의 자유가 오히려 세워진다고 고백합니다 3장 1항. 웨슬리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은 감리교 예배당에서 회심한 이 설교자의 무조건적 선택과 특별 구속에는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이 선행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깨워 응답할 수 있게 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웨슬리, 성경적 구원의 길.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든 죄인을 향한 그의 간절한 초청에서 웨슬리의 부흥과 같은 숨결을 듣습니다. 그 시대의 극단적 칼뱅주의자들이 문제 삼은 것은 바로 그 초청이었습니다. 복음주의 안의 여러 견해는 은혜와 선택 과와 예정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문설주의 피
「강권하여 데려오라」 한 주 뒤, 스펄전은 출애굽의 밤으로 돌아갑니다.
그 피가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있어 너희를 위해 표가 되게 할지니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 12:13
그는 이 설교가 옛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버마에서 서른 해 만에 돌아온 선교사 저드슨이 모험담을 기대한 청중에게 예수의 죽기까지 하신 사랑만을 전했다는 일화를 들려주고, 자기도 언제나 새로운 그 옛 주제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228.3. 그리스도의 피는 유월절 어린 양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흠 없는 제물의 피이며, 또한 하나님이신 분의 피, 단번에 흘려진 피, 부활로 받아들여졌음이 확인된 피입니다 228.12. 그 피만이 구원하고, 홀로 구원하며, 어떤 죄든 씻기에 넉넉하고, 확실하고 온전하게 구원합니다. 성경이 모형으로 미리 보여 준 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이 읽기는 교리 과정의 십자가와 속죄 과에서 더 이어집니다.
설교의 가장 깊은 위로는 셋째 대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피를 볼 때가 아니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집 안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은 문설주의 피를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그러니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께서 피를 보시는 것이지, 여러분이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228.26. 같은 까닭에 그는 자기 회개나 감정, 그 피를 귀히 여기는 정도, 심지어 자기 믿음을 바라보는 일도 경계합니다.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여러분을 붙잡으신 것입니다’ 228.20. 웨슬리가 믿음을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부른 것과 III.1 말은 다르지만, 두 설교자는 모두 듣는 이의 눈을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께로 돌리려 합니다.
침례교 목사인 스펄전은 성례를 의지하는 일을 날카롭게 경고합니다. ‘유아 세례와 견진과 성찬을 의지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거짓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228.15. 그러나 그는 규례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이 정한 규례라도 구원의 기초로 삼으면 그림자보다 가볍다는 것이며, 그러니 ‘다만 그것들을 제자리에 두십시오’ 228.15. 그는 1855년에 1689년의 침례교 신앙고백을 교인들을 위해 다시 펴냈고 제2차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 세례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 받는 것이며 교회는 그런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교회는 교인이 되려면 신자의 세례를 받게 하되, 주의 성찬에는 다른 교파의 신자들도 함께 받아들였습니다.
세례에 관해서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립니다. 유아 세례를 언약의 표로 베푸는 개혁교회는 그의 세례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은혜와 구원이 세례와 떼어 놓을 수 없게 묶여 있지는 않다는 데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그와 함께합니다 28장 5항.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와 루터교회는 세례를 하나님께서 거듭남의 은혜를 주시는 수단으로 가르치므로, 성례를 그리스도 곁에 세운 또 하나의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주시는 길로 받습니다. 여러 전통의 이해는 세례와 성찬 과와 언약의 표: 세례와 유아세례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설교들을 잘 읽으려면
이 설교들은 읽으려고 쓴 글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 앞에서 한 말입니다. 그러니 소리 내어, 한 대지씩 읽으면 좋습니다. 그는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이라고 부르며 말을 걸고, 반대하는 이의 말을 따옴표로 끌어와 답하므로, 따옴표 속의 말이 언제나 그의 생각은 아닙니다. 그는 아이작 와츠의 찬송과 윌리엄 쿠퍼의 시를 즐겨 인용하는데, 죽어 가는 소녀의 노래로는 감리교의 찰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을 들고 7.29, 그리스도인이 평생 품을 마음으로는 칼뱅주의자 토플레이디의 찬송 두 줄을 듭니다 228.28. 그가 오랜 친구라고 부른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은 그가 평생 아낀 책이었습니다.
그는 칼뱅주의라는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이름보다 성경을 앞세웠습니다.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의 끝에서 그는 자기를 읽는 법을 직접 일러 줍니다. ‘제가 진리에서 떠나는 곳에서는 제 말을 던져 버리십시오’ 207.19. 그의 시대 영국 개신교의 논쟁도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은혜의 교리가 교황주의를 무너뜨린다고 외치는 207.9의 대목이나 성례에 대한 경고는 로마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의식을 겨냥한 것인데, 가톨릭과 성공회의 신자들은 그 그림에서 자기 신앙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붙든 요점, 곧 그리스도 말고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을 먼저 들으면 좋습니다.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그는 지옥과 심판을 매우 생생하게 그리고, 듣는 이를 위협하겠다고까지 말합니다 227.20. 그러나 그는 그 까닭을 이렇게 밝힙니다. ‘제가 위협하는 것은 까닭 없이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위협이 당신을 … 복음의 잔치를 마련해 두신 곳으로 몰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227.22. 이 물음은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에서 더 다룹니다. 한 번도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알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7.20의 단호한 말은, 바로 뒤에서 의심하는 이를 위로하는 7.22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7번의 유대인은 어느 교회에나 있는 형식주의자의 본보기이지만, 7.7의 앞부분에서 유대 민족을 저주 아래 떠도는 족속으로 그리는 말은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흔하던 생각을 따른 것이니 가려 읽어야 합니다. 1.10의 흑인 일화는 그 시대의 낮잡는 말투를 그대로 담고 있어 오늘 읽기에 거북합니다. 스펄전 자신은 미국의 노예제를 공개적으로 꾸짖었고, 그 때문에 미국 남부에서는 그의 설교집이 불태워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섯 편이 끝내 가리키는 곳은 하나입니다. 「보혈」의 끝에서 그는 떨고 있는 죄인에게 요한의 말씀을 건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1:7). 그리고 구주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우리 안에 당신도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228.30.
출처
차례 0/5 읽음
싣지 않은 부분: 스펄전이 1855–1858년에 전한 설교 가운데 다섯 편을 『뉴 파크 스트리트 강단』에서 싣습니다. 다른 설교는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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