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16과

EN

흑사병과 대분열, 그리고 후스

1347년부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을 앗아 갔고, 두려움 속에서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학살당했습니다. 1378년 둘로 갈린 교황청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지만, 같은 공의회는 1415년 안전 통행증을 받고 온 얀 후스를 불태웠습니다.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습니다.

대성당 안 공의회 자리에서 검은 옷의 얀 후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서 있고, 주교관을 쓴 고위 성직자와 황제와 추기경들이 그를 둘러싼 그림.
바츨라프 브로지크, 〈콘스탄츠 공의회 앞의 얀 후스〉, 1883년 · 출처

연표에서 보기

흑사병과 유대인 학살

1347년 가을 흑해에서 돌아온 제노바의 배들이 시칠리아에 역병을 싣고 왔습니다. 1348년 흑사병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잉글랜드로 번졌고, 1351년 무렵까지 유럽 거의 모든 곳에 이르렀습니다. 같은 병이 콘스탄티노플과 카이로를 비롯한 동방의 도시들도 휩쓸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하며, 그 피해는 곳에 따라 크게 달랐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시편의 이 말씀은 가깝고도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밤에 임하는 두려움과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둠 속에서 다니는 역병과 한낮에 피폐하게 하는 멸망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곁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쓰러질 터이나 그것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로다.

시 91:5-7

웨슬리는 역병이 어둠 속에서 다닌다는 말을 "보이지 않게 와서, 우리가 미리 보지도 막지도 못한다는 뜻입니다"라고 풉니다 웨슬리. 죽어 가는 이들에게 성례를 베풀던 많은 사제와 수도사가 함께 죽었고, 달아난 이들도 있었습니다. 1348년부터 이듬해까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겠다며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채찍질하는 고행자의 무리가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녔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교회의 손을 벗어난 이 무리를 1349년에 금했습니다.

두려움은 탓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고문으로 얻어 낸 자백이 증거로 쓰였습니다. 1348년과 1349년 바젤과 스트라스부르와 마인츠를 비롯해 특히 독일 땅의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불태워지거나 쫓겨났습니다.

아비뇽의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7월과 9월에 교서를 내어, 유대인도 같은 병으로 죽고 있고 유대인이 없는 곳에서도 병이 돈다는 것을 들어 그 소문이 거짓이라고 밝히고, 그들을 죽이거나 재산을 빼앗는 자는 파문하겠다고 했습니다 클레멘스 6세, 유대인을 보호하는 교서들. 그러나 많은 도시에서 학살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2000년 3월 ‘용서의 날’에 가톨릭 교회(천주교)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에게 지은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기억과 화해.

두 교황, 세 교황

넓은 광장 끝에 높은 탑과 거대한 돌벽으로 된 아비뇽 교황궁이 요새처럼 서 있다.
에두아르 발뒤스, 〈아비뇽 교황궁〉, 1859년 이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출처

1309년부터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청은 1377년 로마로 돌아왔습니다(신학 과정의 중세 말의 위기와 개혁의 선구자들 과). 이듬해인 1378년 로마 사람들이 이탈리아인 교황을 요구하는 가운데 추기경들은 우르바누스 6세를 뽑았습니다. 그러나 몇 달 뒤 대부분의 같은 추기경들이 두려움 속에 한 선거는 무효라며 클레멘스 7세를 뽑았고, 그는 아비뇽으로 갔습니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와 나폴리는 아비뇽을, 잉글랜드와 독일 땅 대부분과 헝가리와 폴란드는 로마를 따랐습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처럼 거룩한 이들도 저마다 한쪽 교황을 따랐고, 평범한 신자들은 누가 참 교황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1409년 피사 공의회가 두 교황을 폐위하고 새 교황을 뽑았지만 아무도 물러나지 않아 교황은 셋이 되었습니다.

분열을 끝낸 것은 독일 왕 지기스문트(훗날 황제)가 앞장서 연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였습니다. 공의회는 피사 쪽의 요한 23세와 아비뇽 쪽의 베네딕투스 13세를 폐위하고 로마 쪽 그레고리우스 12세의 사임을 받은 뒤, 1417년 마르티노 5세를 뽑았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로마 쪽 교황들을 정당한 교황으로 셉니다. 그래서 1958년 교황이 된 안젤로 론칼리는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다시 쓸 수 있었습니다.

프라하의 설교자, 얀 후스

그보다 앞서 잉글랜드 옥스퍼드의 존 위클리프(1384년 죽음)는 성경을 교황의 권위 위에 두었고, 그의 제자들은 1380년대에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옮겨 첫 영어 성경 전체를 내놓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신학 과정의 중세 말의 위기와 개혁의 선구자들 과에서 다룹니다. 그의 책들은 보헤미아의 프라하에까지 건너갔습니다.

얀 후스(1415년 죽음)는 프라하 대학의 교수였고, 1402년부터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체코어로 설교하며 성직자들의 탐욕을 꾸짖었습니다. 1412년 피사 쪽 교황 요한 23세가 벌이는 전쟁의 비용을 모으려고 프라하에서 면벌부가 팔리자 그는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가 파문되고 도시에 성사 금지령이 내려지자, 그는 프라하를 떠나 남부 보헤미아의 시골에서 설교하며 1413년 『교회에 관하여』를 썼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택함받은 이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그 가르침입니다. 그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부탁대로 살려 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서 깨어 있고 고난을 견디며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행하고 네 사역을 온전히 입증하라.

딤후 4:2-5

1414년 후스는 지기스문트가 내준 안전 통행증을 받고 콘스탄츠로 갔지만, 11월에 도착한 지 몇 주 만에 갇혔습니다. 지기스문트는 처음에 항의했으나, 이단 혐의자의 재판은 통행증에 매이지 않는다는 공의회의 주장에 물러섰습니다. 1415년 6월의 심문에서 후스는 성경으로 잘못을 보여 주면 취소하겠다고 했고, 자기가 가르친 적이 없는 조항까지 취소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길은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답한 사도들의 길이었습니다 (행 5:29).

7월 6일 그는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성 밖에서 불태워졌으며, 그의 재는 라인강에 뿌려졌습니다. 이듬해에는 그의 벗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도 콘스탄츠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후스 이후, 1453년, 그리고 오늘

털모자를 쓰고 흰 망토를 두른 후스파 지도자 지슈카가 무기를 짚고 서 있고, 곁의 방패에 붉은 바탕의 성찬 잔이 그려져 있다.
아돌프 리프셔, 〈얀 지슈카〉, 1904년 · 출처

보헤미아는 들고일어났습니다. 후스파는 성찬에서 평신도에게도 잔을 주었고, 잔은 그들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1420년부터 교황과 지기스문트는 거듭 십자군을 보냈지만 얀 지슈카가 이끈 후스파 군대 등에 번번이 패했고, 후스파 또한 수도원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1436년 바젤 공의회와의 합의로 보헤미아의 신자들은 잔을 받게 되었습니다.

1457년에는 그리스도인은 칼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페트르 헬치츠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쿤발트에서 형제단을 이루었습니다. 박해로 흩어진 그 후예들이 1722년 헤른후트에서 다시 모인 것이 뒷날 존 웨슬리가 만난 모라비아 형제단입니다(대각성과 감리교 운동 과).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습니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싸움 중에 죽었고, 하기아 소피아는 모스크가 되었습니다.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맺은 동서 교회의 일치는 도움을 거의 가져오지 못했고, 동방의 오랜 교회인 정교회의 신자 대부분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1054년, 동서 교회가 갈라지다 과). 정교회는 이날을 깊은 슬픔으로 기억하며, 술탄이 세운 새 총대주교 아래에서 무슬림의 다스림을 받으며 믿음을 지켜 갔습니다.

이 시대는 두려움이 어떻게 이웃을 탓하게 하는지, 교회가 얼마나 깊이 갈라질 수 있는지, 그리고 말씀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는지 보여 줍니다. 매튜 헨리는 디모데후서의 이 부탁을 두고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자기 충성의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를 무릅쓰고 감당해야 하며, 순전한 복음을 알릴 모든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1999년 12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에서 후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후스가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일과 그 일이 보헤미아에 남긴 분열을 깊이 슬퍼한다고 말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얀 후스 국제 학술회의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백여 년 뒤 라이프치히에서 마르틴 루터는 후스의 가르침에도 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음 과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그 이야기를 봅니다.

연습

  1. 연습 1 / 8

    역사가들은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얼마가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합니까?

  2. 연습 2 / 8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에 대해 교황 클레멘스 6세가 1348년에 한 일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8

    다음 사건을 일어난 차례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8

    교황이 둘, 셋으로 갈린 대분열은 어떻게 끝났습니까?

  5. 연습 5 / 8

    후스가 1413년 『교회에 관하여』에서 가르친 것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8

    콘스탄츠에서 후스에게 일어난 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8

    1457년 쿤발트에서 시작된 형제단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8. 연습 8 / 8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읽으면 읽음이 됩니다. 눌러서 끄고 켤 수 있습니다.

출처

  1. 교황 클레멘스 6세, 유대인을 보호하는 교서들 1348 — 1348년 7월과 9월, 아비뇽. 흑사병 때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을 두고, 유대인도 같은 병으로 죽어 가고 유대인이 살지 않는 곳에도 병이 퍼지니 그 소문은 거짓이라 하며, 유대인을 죽이거나 약탈하는 자를 파문하겠다고 한다.
  2. 국제신학위원회·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 그리고 용서의 날 2000 — 2000년. 3월에 발표된 국제신학위원회의 문서는 교회가 지난날 그 자녀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는 근거를 밝히고, 같은 해 3월 12일 ‘용서의 날’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리를 섬긴다며 쓴 폭력,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해친 죄, 유대인에게 지은 죄 등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3. 얀 후스, 교회에 관하여 1413 — 1413년.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는 택함받은 이들의 모임이라고 가르친다. 후스는 안전 통행을 약속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갔으나 1415년 화형을 당했다.
  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얀 후스 국제 학술회의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1999 — 1999년 12월 17일, 로마. 대희년을 앞두고 후스에 관한 학술회의에 모인 이들에게, 후스가 당한 잔혹한 죽음과 그 일로 보헤미아 사람들의 마음에 남은 갈등과 분열의 상처를 깊이 슬퍼한다고 말했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