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비텐베르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수도사이자 성경 교수 마르틴 루터가 면벌부를 두고 토론을 청한 95개 논제는 인쇄기를 타고 독일 곳곳으로 퍼졌고, 1521년 보름스에서 그는 자기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는 독일어 성경의 빛과 함께 농민 전쟁과 유대인에 대한 글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면벌부와 95개 논제
마르틴 루터(1483–1546)는 1505년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1512년 신학 박사가 된 그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세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성경을 강의하며 씨름한 물음과 깨달음은 신학 과정의 루터: 십자가 신학과 칭의 과에서 다루고, 이 과는 그 뒤에 일어난 일을 따라갑니다.
1517년 도미니코회 수도사 요한 테첼이 작센 가까이에서 면벌부를 설교했습니다. 가톨릭 교회(천주교)는 면벌부를 ‘대사’라고 부르며, 뉘우쳐 용서받은 죄에 남는 벌을 교회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덜어 주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데 쓰려고 선포한 이 면벌부의 수익 일부는,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높은 자리를 얻으며 진 빚을 갚는 데 쓰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자기 땅에서 이 설교를 막았지만, 비텐베르크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가 면벌부를 사 왔습니다.
10월 31일 루터는 알브레히트에게 편지와 함께 참회와 면벌부의 효력을 토론하자는 95개 논제를 보냈습니다 루터, 95개 논제. 첫 논제는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에서 시작합니다 (마 4:17).
우리의 주님이시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신자의 온 삶이 참회이기를 원하셨다.
95개 논제 1조
루터가 이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못 박았다는 이야기는 주로 그가 죽은 1546년에 필리프 멜란히톤이 쓴 글에 기댑니다 멜란히톤, 루터 라틴어 저작집 제2권 서문. 멜란히톤은 1518년에야 비텐베르크에 왔고, 루터 자신은 이 일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의견은 갈립니다. 그 문이 대학의 게시판으로 쓰였으니 실제로 붙였으리라고 보는 이도 있고, 편지로 보냈을 뿐 못질은 뒷날의 이야기라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10월 31일 자 편지이고,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루터교회는 오늘도 이날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보름스까지
루터는 학자들의 토론을 원했지만, 논제는 그해 말까지 여러 도시에서 인쇄되고 곧 독일어로도 옮겨졌습니다.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가 연 활판 인쇄 덕분에 그가 독일어로 쓴 짧은 설교와 소책자는 평신도에게 바로 닿았습니다.
1519년 여름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신학자 요한 에크가 그를 몰아세우자, 루터는 교황과 공의회도 잘못할 수 있으며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정죄한 얀 후스의 가르침 가운데에도 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흑사병과 대분열, 그리고 후스 과). 1520년에는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빌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잇달아 펴냈습니다. 세례받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것, 성례를 성경으로 다시 따져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자유로운 주인이요 사랑으로 모든 이의 종이라는 것이 그 줄기였습니다. 그는 12월 자기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한 교황의 교서를 불태웠고, 이듬해 1월 파문되었습니다.
1521년 4월 루터는 황제 카를 5세의 부름을 받고 보름스 제국 의회에 나갔습니다. 17일 자기 책들을 취소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하루를 청했습니다. 이튿날 그는 교황과 공의회는 자주 잘못하고 서로 어긋났으니 그것만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며, 성경의 증언이나 분명한 이성으로 설득되지 않는 한 자기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어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함께 전해지는 ‘내가 여기 섰습니다.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그 자리의 기록에는 없고 뒤에 나온 인쇄본에 처음 보여서, 뒷날 더해진 말로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루터,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의 답변.
돌아가는 길에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사람들이 그를 납치한 것처럼 꾸며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겼고, 5월 말 황제의 보름스 칙령은 그를 제국의 법 밖에 두었습니다. 바르트부르크에서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펴낸 『헬라어 신약성경』의 1519년 둘째 판을 바탕으로 석 달이 채 안 되어 신약을 독일어로 옮겼고, 이 번역은 1522년 9월에 나왔습니다. 독일어 성경은 그전에도 있었지만 라틴어 불가타를 옮긴 것이었고, 루터는 원문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독일어로 옮겼습니다. 이 성경은 독일어의 모양을 빚었고, 농부와 장인도 이 말씀을 자기 말로 읽고 듣게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빛과 그림자
1524년부터 이듬해까지 독일 남부와 중부에서 농민들이 일어났습니다. 1525년 봄 그들이 내건 열두 조항은 성경을 들어 회중이 목사를 뽑을 권리와 농노제의 폐지 등을 요구했고, 많은 농민은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자기들의 자유로 들었습니다. 루터는 처음에 영주들의 폭정과 농민들의 폭력을 함께 꾸짖으며 화평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봉기가 번져 수도원과 성이 불타자, 그는 『강도질하고 살인하는 농민 무리를 반대하여』에서 제후들에게 반란자들을 가차 없이 쳐서 누르라고 촉구했습니다. 5월 프랑켄하우젠에서 토마스 뮌처가 이끈 농민군이 무너지는 등 봉기는 수많은 농민의 죽음으로 끝났고, 루터는 그 뒤에도 이 글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1523년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을 개처럼 대해 왔다고 꾸짖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오기를 바라며 친절히 대하라고 썼습니다. 그 제목은 바울의 말과 같습니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체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롬 9:5
그러나 말년인 1543년 그는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 등에서 회당과 학교를 불태우고 집을 허물며 랍비들의 가르침을 금하라고 제후들에게 권했습니다. 20세기 독일의 나치는 이 글을 선전에 끌어다 썼습니다. 루터를 따르는 교회들은 이 일을 자기 이야기로 고백합니다. 1994년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유대인 공동체에 보낸 선언에서 이 글들의 폭력적인 말을 분명히 거부하고, 그 말이 뒷세대에 끼친 해악을 깊이 슬퍼한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유대인 공동체에 보내는 선언.
네 전통이 기억하는 루터, 그리고 오늘
루터교회는 루터를 교회의 창립자가 아니라 복음을 다시 밝힌 교사로 기억하며, 그의 소교리문답을 오늘도 가정과 교회에서 씁니다 루터, 소교리문답. 개혁교회도 그를 종교개혁의 문을 연 사람으로 존중하면서 성찬 등에서는 다른 길을 갔습니다(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종교개혁 이야기 과).
가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루터를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린 이단자로 기억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 여러 가톨릭 학자가 그를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은 사람으로 다시 읽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분열에 양편 모두의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1999년 루터교 세계연맹과 가톨릭 교회는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에서 칭의의 기본 진리에 함께 동의했습니다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 2016년 10월 31일 스웨덴 룬드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루터교회가 함께 기도하며 종교개혁 500주년을 열었고, 종교개혁이 교회에 준 선물에 감사하며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회개했습니다 룬드 공동 기념 선언. 차이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동방의 오랜 교회인 정교회는 이 다툼을 대개 서방 교회 안의 일로 봅니다. 면벌부와 연옥과 교황의 권한을 둘러싼 물음이 서방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1570년대 튀빙겐의 루터교 신학자들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헬라어로 옮겨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에게 보냈을 때, 그는 세 차례의 답신에서 몇 가지에 공감하면서도 믿음과 행위, 성례와 전통에서 정교회의 가르침이 다르다고 정중하게 밝혔습니다 예레미아스 2세, 튀빙겐 신학자들에게 보낸 답신.
루터의 첫 논제는 신자의 온 삶이 참회여야 한다고 말하고, 그 말은 교회가 자기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에도 해당합니다. 루터교회가 유대인에 대한 그의 글을 스스로 거부했듯, 우리도 우리 전통의 영웅을 높이되 그 죄를 덮지 않고, 다른 전통이 그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들어야 합니다. 서로 정죄하던 교회들이 500년 뒤 함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 됨이 아직 오지 않았어도 그 길이 열려 있다는 표지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다 하나가 되게" 하셔서 세상이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요 17:21). 다음 과 취리히, 제네바,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위스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을 봅니다.
연습
- 연습 1 / 8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한 일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8
95개 논제의 첫 논제가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3 / 8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가 한 말은 무엇입니까?
- 연습 4 / 8
1521년 보름스에서 루터가 자기 글을 취소하지 않은 까닭으로 든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5 / 8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지내던 루터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 연습 6 / 8
1525년 농민 전쟁 때 루터가 한 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7 / 8
1994년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루터가 말년에 유대인에 대해 쓴 글에 대해 무엇이라고 밝혔습니까?
- 연습 8 / 8
오늘의 가톨릭 교회가 루터와 종교개혁을 대하는 모습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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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주제
출처
- 마르틴 루터, 95개 논제 1517 — 면벌부의 효력에 대한 토론을 제안한 논제.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기억된다. 읽기
- 필리프 멜란히톤, 루터 라틴어 저작집 제2권 서문 1546 — 1546년, 루터가 죽은 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면벌부에 관한 논제를 게시했다고 전한다. 문에 붙였다는 이야기는 주로 이 뒤늦은 보고에 기댄다.
- 마르틴 루터,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 1520 — 세례받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며, 저마다 자기 일과 직분으로 이웃을 섬긴다고 가르친다.
- 마르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포로 1520 — 1520년. 로마 교회의 일곱 성례 체계를 비판하며, 성경이 세운 성례는 세례와 성찬(그리고 한때 고해)뿐이라고 논한다.
-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 1520 —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모든 것에 자유로운 주인이며, 사랑으로 모든 이를 섬기는 종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신부가 신랑과 하나 되듯 영혼을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니, 둘은 모든 것을 함께 가져 그리스도의 은혜와 생명과 구원은 영혼의 것이 되고 영혼의 죄와 죽음과 정죄는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고 한다. 읽기
- 마르틴 루터,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의 답변 1521 — 1521년 4월 18일. 성경의 증언이나 분명한 이성으로 설득되지 않는 한 자기 글을 철회할 수 없으며,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답한다. ‘내가 여기 섰나이다’는 뒤에 인쇄된 판에 덧붙은 말이다.
- 에라스무스, 헬라어 신약성경 1516 — 처음으로 출판된 헬라어 신약성경. 새 라틴어 번역과 함께 실렸고, 루터와 개혁자들이 원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었다.
- 마르틴 루터, 강도질하고 살인하는 농민 무리를 반대하여 1525 — 1525년. 농민 전쟁 때 영주들에게 반란한 농민들을 거침없이 쳐부수라고 촉구한 소책자로, 그의 가장 가혹한 글 가운데 하나다.
- 마르틴 루터,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 1523 — 1523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을 개처럼 대해 왔다고 꾸짖으며,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함께 살며 일하게 하라고 권하며, 그렇게 하면 그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리라고 바란다.
- 마르틴 루터,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 1543 — 1543년. 말년의 루터가 회당과 학교를 불태우고 유대인의 집을 허물며, 그들의 기도서와 탈무드를 빼앗고 랍비가 가르치지 못하게 하라고 권한 글로, 오늘의 루터교회들이 공식적으로 거부한다.
-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유대인 공동체에 보내는 선언 1994 — 1994년. 루터가 말년에 유대인을 공격한 글과 그 폭력적인 권고를 거부하며, 그것이 후대에 끼친 비극적 결과를 깊이 슬퍼한다고 말한다.
- 마르틴 루터, 소교리문답 1529 —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세례와 성찬을 가정에서 가르치도록 쓴 루터교의 요리문답. 읽기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3 (1964) — 교회의 분열에 양편 모두의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갈라진 형제들을 존중하며 일치를 구한다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 루터교 세계연맹·가톨릭교회,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 1999 — 칭의에 대한 기본 진리에 함께 동의한 문서로, 1999년 10월 31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서명되었다. 우리가 쌓은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루신 일을 믿을 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함께 고백하고, 여기 설명된 가르침에는 16세기에 서로 내린 정죄가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며, 남은 차이도 밝힌다. 세계감리교협의회가 2006년에, 세계개혁교회커뮤니언이 2017년에 이 선언에 함께했다.
- 루터교 세계연맹·가톨릭교회, 룬드 공동 기념 선언 2016 — 2016년 10월 31일, 스웨덴 룬드. 프란치스코 교황과 루터교 세계연맹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함께 기념하며,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회개하고 종교개혁이 준 선물에 감사한다.
- 루터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 — 루터교의 기본 신앙고백. 읽기
-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 튀빙겐 신학자들에게 보낸 답신 1576–1581 — 1576–1581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받아 본 정교회 총대주교가 루터교 신학자들에게 보낸 세 차례의 답신으로, 공감할 점과 함께 신앙만으로의 칭의, 성례, 전통에 관해 정교회의 생각이 다르다고 밝힌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