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이성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이유 없이 믿는 일도, 신뢰 없는 계산도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해를 구하는 일입니다. 교회의 스승들은 오래전부터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고 말해 왔고, 죄가 이성을 얼마나 어둡게 했는지는 변증의 방법들이 서로 다르게 저울질합니다.
두 가지 오해
믿음과 이성을 두고 흔히 두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란 이유 없이, 눈을 감고 믿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성만 있으면 신뢰는 필요 없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둘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에 말을 거시는 분입니다. 먼저 창조 세계가 말합니다.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이니
시 19:1-2
바울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롬 1:19),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이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라고 합니다 (롬 1:20). 하나님은 죄로 붉게 물든 백성을 재판정에 부르시듯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고 하시고 (사 1:18), 바울은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 기록들을 인용하여 그들과 토론하며" (행 17:2) 그리스도가 고난받고 다시 살아야 했음을 풀어 보였습니다 (행 17:3).
그러나 성경은 이성이 홀로 선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잠언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잠 1:7). 히브리서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라고 합니다 (히 11:3). 믿음은 앎을 막지 않고 앎의 한 길이 됩니다. 그 앎은 아직 부분적입니다. 바울도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라고 고백합니다 (고전 13:12). 그러니 믿음은 이유 없는 도약도 모든 것을 아는 계산도 아니라, 이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 알기를 구하는 일입니다. 진리란 무엇인지는 진리란 무엇인가?에서 다룹니다.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에서 "어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려 하면 … 알리라"는 말씀을 (요 7:17) 풀며, 깨달음은 믿음이 받는 상이니 믿으려고 깨달으려 하지 말고 깨닫기 위해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29.6. 안셀무스는 이 길을 이어 『프로슬로기온』 1장 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1장. 그가 이 책에 처음 붙인 제목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프로슬로기온 서문. 신학 과정이 신학이란 무엇인가 과와 안셀무스와 스콜라 신학의 시작 과에서 살피는 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이 닿는 진리와 계시로만 아는 진리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이성으로도 알 수 있지만, 삼위일체와 성육신은 하나님이 알려 주셔야 압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 같은 진리를, 계시로 믿는 신앙 조항이 아니라 그 조항들의 서론이라 부르며 "신앙은 자연적 지식을 전제"한다고 말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제1부 2문 2항. 그러면서도 그 증명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 같은 진리를 믿음으로 받는 것을 막을 것은 없다고 덧붙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과).
장 칼뱅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신성에 대한 감각’(sensus divinitatis)을 심어 두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신성에 대한 감각이 사람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져 있다"고 쓰고 칼뱅, 기독교 강요 1.3, 이것이 학교에서 처음 배우는 교리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수학자요 과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은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썼습니다 파스칼, 팡세 277. 그가 말한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라 증명 없이도 첫 원리를 아는 앎의 자리였습니다 팡세 282. 이성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이성이 사람의 앎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
모든 교부가 철학을 반긴 것은 아닙니다. 200년 무렵 북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단을 반박한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에서,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철학의 학당이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7. 그러나 그가 겨눈 것은 생각하는 일 자체가 아니라 철학을 복음에 섞어 새 가르침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조심하라는 바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골 2:8). 그 자신이 수사학을 익혀 날카로운 논증으로 신앙을 변호한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그의 말로 알려진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문장은 그의 글에 그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문장은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5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것은 세상의 눈에 어리석기에 오히려 믿을 만하다는 역설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5. 십자가를 선포함을 어리석게 여기는 세상에 관한 바울의 말을 이은 것입니다 (고전 1:18-25). 그가 거절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복음을 철학 아래 두는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 물어야 할 것은 죄입니다. 바울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을 보여 준다고 말한 바로 다음 절에서 이렇게 씁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 허망해지고 또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1
에베소서도 이방인을 두고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졌으며"라고 합니다 (엡 4:17-18). 안셀무스도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악덕으로 이토록 닳아 없어지고 잘못의 연기로 흐려져서" 프로슬로기온 1장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지 않으면 지음 받은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죄가 생각까지 어둡게 했다는 데는 그리스도인들이 뜻을 같이합니다. 다만 그 깊이를 첫 과에서 본 변증의 길들은 다르게 저울질합니다. 고전 변증과 증거 변증, 그리고 누적 논증은 죄인도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증거를 따질 수 있고 성령께서 그 증거를 쓰신다고 봅니다 (고전 변증과 증거 변증 과). 전제 변증은 죄가 생각의 출발점부터 비틀었다고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을 알지만 그 진리를 붙잡아 두고 있으니 (롬 1:18), 중립 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전제 변증 과). 개혁파 인식론은 죄가 하나님을 아는 감각을 흐렸고 성령께서 그것을 새롭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개혁파 인식론과 누적 논증 과). 이 과정은 어느 하나를 고르지 않습니다.
대화에서
이해를 구하는 믿음에는 물음도 들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지 아니함을 도와주소서"라고 외쳤고 (막 9:24), 예수께서는 그를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물음 앞에서 믿음을 감추거나 이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친구가 믿음은 증거 없이 믿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이유를 가지고 신뢰하는 것이고 우리도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성만 믿는다는 친구에게는, 이성이 믿을 만하다는 것도 증명 이전에 받아들이는 신뢰라는 점을 함께 생각해 보자고 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려 해도 이성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어딘가에서 출발합니다. 이 말은 상대를 이기는 데 쓰지 말고, 함께 출발점을 살펴보자는 초대로 건네십시오. 다음 과 성경 속의 변증에서는 성경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대답했는지 봅니다.
연습
- 연습 1 / 7
이 과에 따르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7
안셀무스가 『프로슬로기온』 1장 끝에서 고백한 믿음과 이해의 순서는 무엇입니까?
- 연습 3 / 7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성으로는 알 수 없고 계시로만 안다고 본 진리는 무엇입니까?
- 연습 4 / 7
칼뱅이 『기독교 강요』 1권 3장에서 말한 ‘신성에 대한 감각’은 무엇입니까?
- 연습 5 / 7
테르툴리아누스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며 거절한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6 / 7
로마서 1:21과 에베소서 4:18에 비추어, 죄와 이성에 대해 변증의 방법들이 함께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7 / 7
친구가 자기는 이성만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과가 권하는 대화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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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주제
출처
-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29.6 — 406–420년경. 깨달음은 믿음의 상이니, 믿으려고 깨달으려 하지 말고 깨닫기 위해 믿으라고 말한다.
-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1077–1078 —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으로 쓴 기도이자 논증. 하나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논한다. 읽기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 1265–1274년. 중세 신학을 집대성한 저작. 하나님과 창조와 섭리, 인간과 은혜, 그리스도와 성례를 두루 다루며, 하나님은 이성으로도 알려지시나 구원의 진리는 계시로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세계에 시작이 있었다는 것은 이성으로 증명되지 않고 믿음으로 붙든다고 한다(제1부 46문 2항). 읽기
-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 개혁파 신학의 대표 저작. 첫 판은 1536년 바젤에서 나온 작은 책이었고, 1559년의 마지막 판까지 고쳐 쓰며 늘어났다. 1권 7–8장은 성경의 권위가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확증된다고 하고, 성경의 신빙성을 보이는 증거들(8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이차적인 도움이라고 한다. 읽기
- 블레즈 파스칼, 팡세 277 (Brunschvicg), 423 (Lafuma) —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282 (Brunschvicg), 110 (Lafuma) — 우리는 이성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진리를 알며, 첫 원리들은 마음으로 안다.
-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7 — 200년경. 이단이 철학에서 나온다고 하며,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다(7장): 복음에 철학을 섞는 것을 거부한다.
- 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5 — 206년경.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것은 어리석기에 오히려 믿을 만하고, 묻히셨다가 다시 사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확실하다고 말한다(고전 1장의 역설).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말은 이런 꼴로는 그의 글에 없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변증의 여러 방법과 논증, 반론을 그 주장하는 이들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하며, 어느 한 방법만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