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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감정론

조나단 에드워즈 · 1746년

영어 본문: 에드워즈의 원문(1746) · CCEL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신앙 감정론』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대각성의 뜨거운 체험과 그 뒤에 번진 실망 사이에서,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에 크게 있으나 그 감정은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참된 은혜의 표지를 성경으로 가려낸 책입니다.

어두운 배경 앞에 회색 가발을 쓰고 검은 성직자 옷에 흰 띠를 단 조나단 에드워즈의 상반신 초상입니다.
헨리 오거스터스 루프(조지프 배저의 원작), 〈조나단 에드워즈〉, 1860년(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 · 출처

노샘프턴의 목사와 대각성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코네티컷의 한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에서 공부했습니다. 1720년대 후반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의 회중교회에서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더드와 함께 목회를 시작했고, 1729년 스토더드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그 교회를 홀로 맡았습니다. 1734–35년 그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고, 이 일을 기록한 그의 글은 대서양 건너편에서도 널리 읽혔습니다. 1740년 가을 조지 휫필드가 뉴잉글랜드를 돌며 설교한 뒤로 부흥은 노샘프턴을 비롯한 뉴잉글랜드 곳곳에 다시 번졌습니다. 아메리카에서는 이 시기를 ‘대각성’이라 부르며, 그 이야기는 신학 과정의 경건주의와 대각성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흥에는 그늘도 따랐습니다. 설교 도중 소리 지르고 쓰러지는 일을 성령의 확실한 표징으로 내세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충동을 성령의 인도로 믿은 순회 설교자 제임스 대븐포트는 회심 체험을 말하지 못하는 목사들을 공공연히 거듭나지 않은 자라고 불렀다가, 1744년 자기 잘못을 글로 뉘우쳤습니다. 반대편에서는 보스턴의 목사 찰스 촌시가, 신앙에서 사람을 이끌어야 할 것은 고양된 감정이 아니라 밝아진 지성이라고 보고 순회 설교자들이 목사들을 판단하며 교회의 질서를 흔드는 것을 걱정하여, 1743년에 펴낸 책에서 부흥의 많은 부분을 들뜬 열광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교회들은 부흥을 지지하는 쪽(‘뉴 라이트’)과 반대하는 쪽(‘올드 라이트’)으로 갈라졌습니다.

에드워즈는 처음부터 부흥을 변호했습니다. 1741년 뉴헤이븐의 예일 대학 졸업식에서 한 강연을 바탕으로 펴낸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가려내는 표지』(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그는 사도 요한의 권면을 따라 무엇이 성령의 일인지 가리는 표지를 살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그것들을 시험하라. 이는 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나와서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라.

요일 4:1

『신앙 감정론』은 그 뒤, 열기가 식고 실망이 번지던 때에 나왔습니다. 많은 학자는 이 책이 1742–43년 노샘프턴에서 한 일련의 설교에서 자라났다고 봅니다. 1746년 보스턴에서 책을 펴낼 무렵, 에드워즈는 바람이 바뀐 것을 이렇게 적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고양된 신앙 감정이면 그 근원을 따져 보지도 않고 모두 참된 은혜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사 년 전에 퍼져 있던 극단이었다’ I.3.1.2. 이제는 거꾸로 모든 감정을 구별 없이 내버리는 쪽이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올바른 길은 모든 감정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감정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며, 감정들을 구별하여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거부하는 것’ I.3.1.7, 곧 알곡과 쭉정이, 금과 찌끼를 갈라놓는 일입니다. 이 책은 부흥의 감정을 깎아내리지도, 그대로 믿지도 않고 시험합니다.

세 부와 열두 표지

『신앙 감정론』은 세 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는 베드로전서 1:8을 본문으로 신앙 감정이 무엇이며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룹니다. 박해 가운데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불로 연단한 금처럼 드러난 것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그 안에서의 기쁨이었습니다.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하나 믿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나니

벧전 1:8

이 말씀에서 그는 책 전체가 기대는 한 문장을 끌어냅니다. ‘참된 신앙은 상당 부분 거룩한 감정에 있다’ I.intro.11. 그러고는 감정이 무엇인지 밝히고, 열 가지 논증으로 이 교리를 세운 뒤, 세 가지 추론을 이끌어 냅니다. 2부는 감정이 은혜에서 왔는지 아닌지를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증명하지 못하는 열두 가지를 듭니다. 감정이 매우 높이 올라간다는 것, 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신앙에 대해 뜨겁고 유창하게 많이 말하게 한다는 것, 성경 구절이 놀랍게 마음에 떠오른다는 것, 자기 상태를 크게 확신하게 한다는 것 같은 것들입니다. 부흥의 열성파가 은혜의 증거로 내세우던 것도, 반대자들이 거짓의 증거로 들던 것도 대부분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3부는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을 가려내는 열두 표지를 내놓습니다. 참된 감정은 성령의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작용에서 일어나고(첫째), 신적인 것들이 그 자체로 지닌 탁월함을 첫째 근거로 삼으며(둘째), 그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셋째). 또 영적으로 밝아진 깨달음에서(넷째), 신적인 일들이 실재하고 확실하다는 확신과 함께(다섯째) 일어납니다. 복음적인 낮아짐(여섯째)과 본성의 변화(일곱째), 어린 양 같고 비둘기 같은 그리스도의 성품(여덟째), 부드러운 마음(아홉째)이 따르고, 서로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며(열째), 높아질수록 더 사모하게 하고(열한째),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실천에서 열매를 맺습니다(열두째).

여기에 실린 것은 다섯 부분입니다. 1부는 둘로 나뉘어, 앞부분에는 본문과 교리, 감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처음 다섯 논증이 있고, 뒷부분에는 다윗과 바울과 요한, 그리스도, 하늘의 신앙,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 마음의 강퍅함을 다루는 나머지 다섯 논증과 세 가지 추론이 있습니다. 3부에서는 표지에 앞서 덧붙인 세 가지 주의, 새로운 영적 감각까지의 첫째 표지, 둘째 표지 전체, 그리고 열두째 표지의 진술과 세 가지 함축과 그 논증을 싣습니다. 첫째와 둘째 표지는 참된 감정이 어디에서 오고 무엇을 바라보는지를, 열두째 표지는 그 감정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싣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저자 서문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보다 사람에게 더 중요한 물음은 없다고 말합니다. 2부 전체와 셋째부터 열한째까지의 표지도 빠졌습니다. 첫째 표지의 나머지 긴 대목은 상상에 새겨지는 인상과 성령의 증언 같은 것들을 이 원리로 가늠하고, 열두째 표지의 나머지에서 그는 실천이 다른 사람을 볼 때에나 자기 양심 앞에서나 모든 표지 가운데 으뜸이라고 논증합니다. 다만 열두째 표지는 앞의 표지들을 하나하나 다시 불러내어 그것들이 왜 실천으로 이어지는지 보여 주므로 III.12.27, 빠진 표지들의 요지도 거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빛과 열

어두운 시골집 방, 덮어 둔 책 곁의 탁자 위에 촛불 하나가 타고, 넓은 벽돌 난로에서 장작불이 타올라 그 빛과 온기가 마룻바닥에 번진다.
촛불과 난롯불이 켜진 어두운 방

에드워즈가 말하는 감정은 오늘 우리가 흔히 쓰는 기분이나 정서와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이 영혼에 두 가지 기능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사물을 살피고 판단하는 지성, 그리고 살핀 것에 끌리거나 그것을 꺼리는 성향, 곧 의지입니다. 감정은 이 둘째 기능의 활동입니다. ‘감정은 다름 아니라 영혼의 성향과 의지의 더 힘차고 뚜렷이 느껴지는 활동이다’ I.1.2. 그러니 감정과 의지는 두 기능이 아니며, 사랑과 미움, 갈망과 기쁨과 슬픔은 마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기울어짐이 힘차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는 감정의 자리를 몸이 아니라 영혼에 두고, 더 갑작스럽고 격렬하여 마음이 스스로를 덜 다스리는 정념과 구별합니다 I.1.9.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교리는 거의 저절로 따라 나옵니다. 하나님은 미지근한 바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사랑을 요구하시고, 사람은 무엇에든 마음이 움직일 때에야 그 일에 몸을 던집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감정 없이 교리적 지식과 사변만 가진 사람은 결코 신앙의 일에 몰두하지 않는다’ I.2.2.2. 성경은 두려움과 소망, 사랑과 미움, 갈망과 기쁨, 슬픔과 감사, 긍휼과 열심을 신앙의 큰 부분으로 말하고,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1부 뒷부분에서 그는 다윗의 시편과 바울과 요한의 편지를 펼친 뒤 그리스도께로 갑니다. 그리스도는 ‘놀라울 만큼 부드럽고 정 깊은 마음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I.2.7. 복음서는 그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사 그 도시를 보시고 그 도시로 인해 슬피 우시며" (눅 19:41),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예수님께서 우시더라"고 전합니다 (요 11:35). 성경이 마음의 죄를 강퍅함에 두는 것도 같은 쪽을 가리킵니다. 강퍅한 마음은 감동을 받지 않는 마음이고, 하나님은 회심 때 "너희 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로 된 마음을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겔 36:26).

그렇다고 에드워즈가 감정이면 무엇이든 높인 것은 아닙니다. 감정의 크기로 신앙의 크기를 잴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정도는 지금 마음이 얼마나 크게 움직이느냐보다 ‘습성의 확고함과 힘으로 판단해야 한다’ I.2.10.6. 그가 말하는 감정은 스쳐 가는 기분이 아니라 마음에 자리 잡은 기울어짐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참된 성도 안에도 영적이지 않은 감정이 많아서 ‘그들의 신앙 감정은 흔히 섞여 있다’ I.2.10.6. 그는 지성과 마음을 빛과 열에 견줍니다. 한편으로 ‘빛 없이 열만 있는 곳에서는 그 마음에 신적이거나 하늘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I.3.1.3. 다른 한편으로 ‘머리는 개념과 사변으로 가득하나 마음은 차갑고 감동이 없는 곳’에서는 I.3.1.3 그 지식이 참된 영적 지식이 아닙니다. 부흥의 반대자들이 빛 없는 열을, 열성파가 열 없는 빛을 두려워했다면, 에드워즈는 둘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설교와 기도와 찬송은 바람직하며, 신앙의 일들이 그 본성에 맞게 참되게 제시된다면 ‘감정을 움직이는 경향이 크면 클수록 더 좋다’ I.3.2.3. 1부는 복음의 크신 일들 앞에서 이토록 무덤덤한 우리가 티끌까지 낮아져야 한다는 탄식으로 끝납니다 I.3.3.3.

새 감각에서 열매까지

첫째 표지는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를 묻습니다.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에 미치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영향과 작용에서 일어난다’ III.1.1. 여기서 ‘영적’이란 몸에 맞선 영혼의 일이 아니라 성령께 속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자연인에게도 여러 모양으로 작용하십니다. 양심을 일깨우시고 재능을 도우시며, 발람에게 하셨듯이 환상을 보이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에 이미 있는 것을 움직이고 북돋우실 뿐 새것을 주시는 일이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합니다 III.1.19. 성도 안에서는 성령이 자기의 거처로 삼아 거하시며 새 본성의 원리가 되십니다 III.1.9. 그래서 중생한 사람에게는 새 기능이 아니라 ‘새로운 영적 감각’이 생깁니다 III.1.17. 그 차이를 그는 꿀에 견줍니다. 성도가 신적인 일들 안에서 지각하는 것은 자연인이 지각하는 것과 다른데, 그것은 ‘꿀의 단맛이, 사람들이 꿀을 바라보거나 만져 보기만 해서 갖는 꿀에 대한 관념과 다른 것과 같다’ III.1.17. 바울도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합니다 (고전 2:14). 부흥 때 많은 사람이 환상과 음성과 마음에 새겨진 인상을 성령의 증거로 여겼지만, 이 표지에 비추면 그런 것은 그 자체로 은혜의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둘째 표지는 감정이 무엇을 바라보는지를 묻습니다. 은혜로운 감정의 첫째 근거는 ‘신적인 것들이 그 자체로 지닌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이지 III.2.1,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느냐가 아닙니다. 모든 사랑은 결국 자기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는, 하나님을 자기 행복으로 여기게 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열매라고 답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이 아버지를 낳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III.2.4. 자기 사랑에서 나온 감사도 하나님을 향해 크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홍해에서 노래하고 곧 잊어버린 이스라엘과 나병이 나은 나아만이 그러했습니다 III.2.8. 차이는 순서에 있습니다. ‘성도의 감정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며, 자기 사랑은 오직 결과적으로, 이차적으로만 이 감정에 관여한다’ III.2.14. 위선자는 자기를 맨 밑에 놓고 하나님을 그 위에 얹습니다. 그렇다고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시 116:1). 에드워즈는 사도 요한의 말씀에 기댄 반론에도 답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요일 4:19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주신 선물이며, 구속에서 드러난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큰 부분이기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III.2.20. 위험은 다른 데 있습니다. 위선자는 그리스도보다 자기 체험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깨달아 알게 된 그리스도보다 자기의 깨달음에서 더 많은 위로를 얻는다’ III.2.23.

열두째 표지는 감정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묻습니다.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에서 활동하고 열매를 맺는다’ III.12.1. 여기에는 세 가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의 실천이 기독교의 규칙에 전면적으로 부합하는 것, 그 실천을 무엇보다 삶의 주된 일로 삼는 것, 그리고 주일이나 특별한 때만이 아니라 모든 변화와 시련 속에서 삶이 끝날 때까지 그 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III.12.2. 전면적이라는 것은 악을 피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야 할 선까지 행한다는 뜻입니다 III.12.6.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경계하는데 (딤후 3:5), 에드워즈는 그 능력이 어디서 드러나는지 말합니다. ‘참된 경건의 능력은 주로 여기에서, 곧 그것이 효력 있는 실천이 된다는 데서 드러난다’ III.12.15. 거짓 감정은 행동의 샘까지 내려가지 못합니다. 그는 겉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 같아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조각상과, 흙이 깊지 않은 돌밭의 씨를 듭니다 III.12.14.

그러나 돌밭 속에 씨를 받은 자 곧 그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나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만 견디는 자니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그가 곧 실족하느니라.

마 13:20-21

성전의 금 등대에는 꽃받침과 꽃이 번갈아 달려 있었고, ‘꽃과 열매는 어김없이 늘 이어져 있었다’ III.12.30. 아름다운 고백이 꽃이라면 거룩한 실천은 그 열매입니다. 이 책에 실리지 않은 뒷부분에서 에드워즈는 이 실천을 모든 표지 가운데 으뜸이라고 부릅니다. 앞의 열한 표지가 모두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그의 논증을 생각하면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마 7:20). 이것은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의와 그가 자기들을 위하여 이루신 일을 의지하고 참으로 그를 먹고 그로 말미암아 사는 참된 믿음에는, 그리스도인의 일과 경주에서의 그런 열심의 영이 언제나 따른다’고 씁니다 III.12.7. 열매는 뿌리가 아니라, 뿌리가 살아 있다는 표입니다.

셋째 함축, 곧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에드워즈가 선 개혁 신학의 성도의 견인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는 참된 성도도 큰 죄에 빠질 수 있지만 신앙에서 아주 떨어져 나가지는 않으며, 떨어져 나가는 이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봅니다 III.12.11. 웨슬리 전통을 비롯한 아르미니우스주의 신자들은 참된 신자도 고의로 떨어져 나갈 수 있고 회개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으므로, 같은 대목을 끝까지 견디라는 경고로 읽습니다. 두 전통 모두 열매 없는 믿음은 산 믿음이 아니라는 데에는 뜻을 같이합니다. 구원은 잃을 수 있는가?와 교리 과정의 성화와 견인 과도 함께 읽어 보십시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가운데 작은 종탑이 있는 길고 단정한 3층 석조 건물 위로 아기 천사 둘이 라틴어 표어가 적힌 띠를 펼쳐 들고 있다.
작자 미상, 〈나소 홀〉, 뉴저지 대학(오늘의 프린스턴 대학교), 1760년 · 출처

에드워즈는 1750년 성찬 참여 자격을 두고 교인들과 갈등하다 노샘프턴 교회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그 뒤 변경의 스톡브리지에서 원주민들에게 설교했고, 1758년 뉴저지 대학(오늘날의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천연두 예방 접종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책은 그보다 오래 읽혔습니다. 존 웨슬리는 1770년대에 이 책을 줄여 펴내면서, 서문에서 에드워즈가 부흥 때 회심했다던 많은 이가 떨어져 나간 일을 그들이 처음부터 참으로 회심하지 않았다는 말로 설명하여 성도의 견인을 지키려 했다고 보았고, 미묘한 구별들이 평범한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려 하나님이 그들 안에 하신 일까지 의심하게 할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크게 유익한 대목들을 골라 실었습니다. 그 뒤 영국과 아메리카의 여러 부흥 때에도 목회자들은 체험을 분별하려고 이 책을 다시 펴 들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복음주의 목회자가 회심과 영적 체험을 살필 때 이 책을 곁에 둡니다.

이 책은 청교도 설교의 틀을 따릅니다. 본문에서 교리를 끌어내고, 번호를 붙인 논증으로 세우고, 추론으로 적용합니다. 문장이 길고 성경 인용이 촘촘하니, 한 번에 한 논증씩 천천히 읽으십시오. 1부에 나오는 ‘동물 정기’는 신경 속을 흐른다고 그 시대 의학이 생각한 몸의 아주 미세한 액체입니다. 그 생리학은 낡았지만, 감정의 자리는 몸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그의 요점은 그것과 상관없이 섭니다.

표지들을 남을 재는 잣대로 쓰지 마십시오. 에드워즈는 3부 첫머리에서, 누가 참된 신자이고 누가 위선자인지 확실히 가르는 규칙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다고 못 박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자기의 특권으로서 자기에게 남겨 두려 하셨다’ III.pre.3. 자기를 살필 때에도 표지에만 매달리지 마십시오. 은혜가 약해진 사람은 어둠 속에 있어서 어떤 표지로도 만족을 얻지 못하며, ‘확신은 자기 점검으로보다는 행함으로 얻어진다’ III.pre.8. 에드워즈의 말대로, 바울은 상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따져 보는 것보다 달려가는 것으로 더 많이 얻었습니다.

위선자를 향한 그의 말은 날카로워서, 예민한 독자는 자기를 끝없이 의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둘째 표지로 돌아가십시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위선자의 감정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참된 감정은 자아 밖,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서 있으므로, 자기의 추함을 깨닫는 것이 그 감정을 정결하게 하기는 해도 ‘무너뜨리지는 않으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 감정을 더 감미롭게 하고 더 높여 줄 것이다’ III.2.27. 이 책의 목표는 의심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에드워즈가 꿀의 단맛에 견준 그 감각을 시편은 이렇게 부릅니다.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시 34:8

출처

  1.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 감정론 1746 읽기

차례 0/5 읽음

싣지 않은 부분: 세 부 가운데 1부와 3부의 서론, 그리고 열두 표지 가운데 첫째, 둘째, 열두째 표지를 싣습니다. 첫째와 열두째 표지는 앞부분만 싣습니다. 저자 서문과 2부, 3부의 나머지 아홉 표지는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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