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5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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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박해에서 공인으로

312년 밀비우스 다리에서 이긴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 밀라노에서 그리스도인과 모든 사람에게 예배의 자유를 주었고, 325년 니케아에 감독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가 니케아의 신앙을 제국의 신앙으로 세우기까지, 교회는 박해에서 벗어났지만 권력과 묶이는 값도 치렀습니다.

커다란 눈으로 위쪽을 바라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거대한 대리석 머리 조각.
콘스탄티누스 거상의 머리, 4세기 초,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 · 출처

연표에서 보기

밀비우스 다리, 312년

312년, 동방에서는 303년에 시작된 대박해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로마 제국에서는 여러 황제가 권력을 다투고 있었습니다(이 과정의 박해와 순교자들 과). 306년 브리타니아의 요크에서 병사들이 황제로 세운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내려왔습니다. 10월 28일 로마 북쪽 테베레 강의 밀비우스 다리 앞에서 그는 로마를 차지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무찔렀고, 막센티우스는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전투 전에 일어난 일은 두 그리스도인 저술가가 전합니다. 락탄티우스는 315년 무렵, 콘스탄티누스가 전투 전날 꿈에서 하나님의 하늘 표지를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라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했다고 씁니다 락탄티우스,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44장. 가이사랴의 감독 에우세비우스는 337–339년 무렵 쓴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서 황제에게 직접 들었다며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낮에 해 위로 빛으로 된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기라는 글을 보았고, 그 표지를 본떠 군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는 꿈과 하늘의 환상, 방패와 군기에서 서로 다르고, 에우세비우스의 이야기는 전투 뒤 사반세기가 지나서야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의 의견은 갈립니다. 해 둘레에 생기는 빛의 고리 같은 것을 보았으리라고 보는 이도 있고, 이야기가 거듭 전해지며 자랐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때부터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의 표지를 내걸고 그리스도인들을 편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옛 로마 종교의 대제사장 칭호를 지녔고, 죽음을 앞둔 337년에야 세례를 받았습니다.

밀라노에서 니케아까지

황제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회의장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손을 들고 말하고, 둘레에 앉은 주교들이 귀를 기울인다.
바실리 수리코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1876–1877년 · 출처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황제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만나, 그리스도인에게도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저마다 원하는 신앙을 따를 자유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해 여름 리키니우스가 동방에 공포한 그 문서를 락탄티우스가 옮겨 싣습니다 락탄티우스,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48장. 흔히 밀라노 칙령이라 부르지만,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세운 문서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예배의 자유를 준 합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에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로마의 라테라노와 베드로의 무덤으로 기억되던 바티칸 언덕, 예수의 무덤으로 기억되던 예루살렘의 자리에 큰 교회를 짓게 했고, 성직자들의 공적 부담을 덜어 주었습니다. 321년에는 ‘해의 날’, 곧 주일에 법정과 도시의 일터가 쉬게 했습니다. 324년 리키니우스를 꺾고 홀로 황제가 된 그는 330년 동방에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봉헌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가 아들은 지음을 받은 존재라고 가르쳐 동방 교회가 흔들리자, 황제는 325년 니케아로 감독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공의회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신 참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고, 이 고백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쳐 오늘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니케아 신경이 되었습니다. 그 논쟁과 고백은 신학 과정의 니케아: 성자는 참 하나님이신가 과에서 다룹니다. 이 과에서 볼 것은 황제의 자리입니다. 공의회를 부른 것도, 서명하지 않은 아리우스와 두 감독을 유배 보낸 것도 황제였고, 335년 여러 고발 끝에 아타나시우스를 유배 보낸 것도 황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삶에는 그림자도 짙습니다. 326년 그는 맏아들 크리스푸스를 처형하게 했고, 얼마 뒤 아내 파우스타도 죽었습니다. 그 까닭은 지금도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테살로니카, 380년: 얻은 것과 치른 값

380년 2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테살로니카에서 칙령을 내려, 제국의 모든 백성은 사도 베드로가 로마인에게 전한 신앙,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성으로 믿는 신앙을 따르라고 명했습니다. 이 신앙을 따르는 이들만 보편 교회의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고, 나머지는 이단으로서 하나님의 벌과 황제의 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313년의 합의가 모든 이에게 자유를 주었다면, 이 칙령은 니케아의 신앙을 제국의 신앙으로 세웠습니다.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자 교회는 바울의 이 말씀을 새로운 눈으로 읽었습니다.

모든 혼은 더 높은 권력들에 복종할지니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이 없으며 이미 있는 권력들도 하나님께서 임명하셨느니라.

롬 13:1

그러나 교회는 베드로와 사도들이 공회 앞에서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한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행 5:29). 4세기 말 안디옥의 설교자 크리소스토무스는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라는 말씀을 풀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바치라는 이 명령을 들을 때, 종교에 조금도 반하지 않는 것만을 가리키는 줄 알아야 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그는 뒷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었다가 황제의 궁정과 부딪혀 유배지에서 죽었습니다.

박해받던 이들은 차츰 박해하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391년과 392년 테오도시우스의 법은 이교의 제사와 신전 예배를 금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을 비롯한 여러 신전이 그리스도인 무리의 손에 무너졌습니다. 388년 유프라테스 강가의 칼리니쿰에서 감독이 부추겼다고 전해지는 무리가 회당을 불태우자 테오도시우스는 감독에게 회당을 다시 지어 주라고 명했지만,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가 황제를 설득해 그 명령을 거두게 했습니다. 385년 무렵에는 이단으로 몰린 스페인의 감독 프리스킬리아누스가 다른 감독들의 고발로 트리어의 황제 법정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투르의 감독 마르티누스는 이를 막으려 애썼고, 암브로시우스도 그 죽음을 구한 감독들과 사귐을 끊었습니다.

2000년 3월 ‘용서의 날’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자녀들이 진리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휘두른 폭력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기억과 화해. 진리를 칼로 지키려는 길은 중세에 더 깊어졌고(종교재판과 이단 과), 뒷날 개신교회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두 기억, 그리고 오늘의 교회

보석 박힌 금빛 띠를 두른 붉은 황제 예복에 관을 쓴 콘스탄티누스가 두루마리를 쥐고 서 있고, 곁에 관과 너울을 쓴 어머니 헬레나가 작은 십자가를 들고 서 있으며, 두 사람 위에 그리스어로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표도르 솔른체프, 〈성 콘스탄티누스와 헬레나〉(키예프 성 소피아 대성당 11세기 프레스코의 모사), 1869년 (뉴욕 공립 도서관) · 출처

동방의 오랜 교회인 정교회는 해마다 5월 21일에 콘스탄티누스를 어머니 헬레나와 함께 ‘사도와 동등한 이’로 기립니다. 박해를 끝내고 첫 보편 공의회를 불러 모은 그를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쓰신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서방의 가톨릭 교회(천주교)는 그를 대개 성인으로 기리지 않았지만, 교회에 자유를 준 황제로 기억해 왔습니다.

16세기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인이 칼을 쓰지 않는다고 고백했고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6조, 여러 재세례파 저술가는 교회가 황제의 칼과 하나가 된 4세기에서 교회가 길을 잃은 때를 보았습니다(신학 과정의 재세례파와 급진 종교개혁 과).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루터교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많은 사람이 교회의 권세와 칼의 권세를 부적절하게 뒤섞었다"고 하며 두 권세를 나누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28조. 그러면서도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와 잉글랜드 교회에서 자란 성공회는 오랫동안 군주가 교회를 보호하는 국가 교회의 모습을 이어 갔습니다. 오늘 여러 전통의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국가가 하나였던 이 긴 시대를 함께 돌아보며 그 빛과 그림자를 따집니다.

순교자들의 후예가 마음껏 예배하고, 교회를 짓고, 주일에 쉬게 된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황제의 호의는 교회를 그 힘에 기대게 했고, 313년 모든 이에게 주어졌던 자유는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다른 이들에게서 거두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내 왕국이 여기에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

요 18:36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나라가 세상 끝날까지 여기에 있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여기에서 나지 아니한 것은 세상에서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풀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권력의 보호를 받을 때에도 교회는 나그네로 살며, 자기가 누리는 자유를 이웃에게도 구해야 합니다. 다음 과 사막과 수도원에서는 교회가 편안해지던 그 시대에 사막과 수도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봅니다.

연습

  1. 연습 1 / 7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의 일을 락탄티우스와 에우세비우스는 어떻게 전합니까?

  2. 연습 2 / 7

    313년 밀라노의 합의가 준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7

    다음 사건을 일어난 차례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7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한 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7

    380년 테오도시우스의 테살로니카 칙령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7

    388년 칼리니쿰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7

    콘스탄티누스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읽으면 읽음이 됩니다. 눌러서 끄고 켤 수 있습니다.

출처

  1. 락탄티우스,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 315년경. 303년부터의 대박해와 박해한 황제들의 최후를 전한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꿈에서 하늘의 표지를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하고(44장), 313년 밀라노에서 합의하고 리키니우스가 공포한 문서, 곧 그리스도인과 모든 사람에게 예배의 자유를 준 이른바 밀라노 칙령을 옮겨 싣는다(48장).
  2. 에우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1.28–31 — 337–339년경. 콘스탄티누스가 해 위에 빛으로 된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기라’는 글을 보고 그 표지를 본떠 군기를 만들었다고, 황제가 에우세비우스에게 직접 들려준 대로 전한다.
  3. 국제신학위원회·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 그리고 용서의 날 2000 — 2000년. 3월에 발표된 국제신학위원회의 문서는 교회가 지난날 그 자녀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는 근거를 밝히고, 같은 해 3월 12일 ‘용서의 날’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리를 섬긴다며 쓴 폭력,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해친 죄, 유대인에게 지은 죄 등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4. 스위스 형제단,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1527 — 재세례파의 첫 신앙고백. 회개하고 믿는 이에게 주는 세례(1조), 세상과의 구별, 칼을 쓰지 않음(6조), 맹세하지 않음(7조) 등 일곱 조항.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회 역사의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교회의 이야기를 각 전통이 기억하는 대로 공정하게 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의 역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예수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