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4:17
패전을 전한 소식꾼
- 복음의 말 בָּשַׂר basar · 소식을 전하다
원어
번역
그 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또 백성 가운데는 큰 살육이 있었으며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니라.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The messenger answered, “Israel has fled before the Philistines, and there has been a great slaughter among the people. Your two sons, Hophni and Phinehas, are both dead, and the ark of God has been captured.”
And the messenger answered and said, Israel is fled before the Philistines, and there hath been also a great slaughter among the people, and thy two sons also, Hophni and Phinehas, are dead, and the ark of God is taken.
And he who is bearing tidings answers and says, “Israel has fled before the Philistines, and also a great slaughter has been among the people, and also your two sons have died—Hophni and Phinehas—and the Ark of God has been captured.”
주석
매튜 헨리 삼상 4:12-18 전체에 대하여
군대의 패배는 사사였던 엘리에게 매우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너그럽게 대하였고 그가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 대로 회개하지 않고 죽었을 그의 두 아들의 죽음 소식은 그를 아버지로서 감동시켰으나, 그의 영에는 그보다 더 큰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령이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라고 이야기를 맺었을 때, 그는 마음에 충격을 받고 즉시 죽었습니다. 사람이 비참하게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으며, 때 아닌 최후를 맞이해도 그 끝이 평안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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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성경의 차례로 볼 때 ‘소식을 전하다’라는 히브리어 가 처음 나오는 곳은 승전보가 아니라 패전보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의 뿌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 가운데 하나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지자 실로에서 하나님의 궤를 진영으로 메어 왔습니다. 궤가 있으면 이기리라고 여겼지만 더 크게 패했고, 보병 삼만 명이 쓰러졌으며, 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삼상 4:3–11). 그날 베냐민 사람 하나가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뿌린 채 실로로 달려왔습니다. 아흔여덟 살의 엘리는 하나님의 궤 때문에 마음이 떨려 길옆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가 "내 아들아,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고 묻자 (삼상 4:16) 이 구절의 대답이 나옵니다.
대답은 네 마디이고, 한 마디씩 더 무거워집니다. 이스라엘이 도망하였고, 큰 살육이 있었고,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고,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삼상 4:18). 그의 며느리는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두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고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삼상 4:21) 하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소식을 가져온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바사르의 피엘 분사에 정관사가 붙은 הַמְבַשֵּׂר(함바세르)로, ‘소식을 가져온 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동사만으로는 소식이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바사르는 대개 반가운 소식에 쓰이지만, 여기서는 나라의 패배와 제사장 집안의 몰락을 나릅니다. 이 폭에 비추어 보면, 이사야가 시온에 오는 전령을 그리며 그가 가져오는 것을 하나하나 밝히는 대목이 새롭게 보입니다. 화평과 좋은 소식과 구원, 그리고 "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사 52:7)는 말입니다. 신약도 ‘좋은 소식’을 빈말로 두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롬 1:3)고 내용을 밝혀 둡니다.
번역을 보면, 흠정역은 킹제임스 성경의 messenger를 따라 ‘그 사자가 대답하여’라고 옮겼고, 개역한글은 ‘소식을 전하는 자가’라고 하여 히브리어 분사를 살렸습니다. ‘사자’는 그 사람이 맡은 역할을, ‘소식을 전하는 자’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이름 짓습니다. 둘 다 바른 번역이고, 개역한글 쪽은 이사야 40:9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를 부를 때와 같은 말을 써서, 같은 동사가 여기서는 재앙을 전하는 자에게 쓰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매튜 헨리는 두 아들의 죽음 소식이 엘리를 아버지로서 흔들었으나 "그의 영에는 그보다 더 큰 염려가 있었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웨슬리도 엘리가 하나님의 궤를 "자기의 모든 자연적인 애정보다 앞세워" 아꼈다고 봅니다 웨슬리. 헨리는 노인의 비참한 최후 앞에서 "사람이 비참하게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으며"라고 덧붙입니다 매튜 헨리.
엘리를 무너뜨린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복음은 그 반대 방향의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막 1:15)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소식이라는 말이 이런 무게의 소식도 나를 수 있었기에, 복음을 ‘좋은’ 소식이라 부르는 말은 가볍지 않습니다.